천한 직업의 꼬리표 ‘굴지기’는 내 아버지의 또 다른 이름이다. 1970년대, 아버지는 철도 터널을 지키는 간수였다. 경산과 청도를 잇는 ‘남성현 터널’이 바로 그 일터다.
왕복 터널 길이 4.4㎞, 경부선 철도의 많은 터널 중 맏형격인 그곳에만 유일하게 간수가 존재했다. 간수 역시 엄연한 철도 공무원이지만 사람들은 아버지를 ‘굴지기’라고 불렀다.
기차의 기적 소리로 시간을 가늠하던 그 시절, 문명이라고는 작은 간이역이 전부인 우리 마을에는 철도 공무원이 많았다. 역무원과 객차 검수원, 선로 보수 요원, 건널목 간수까지 직종도 다양했다. 그 중에서도 왜 하필 굴지기란 말인가. 나는 터널을 지키는 아버지가 마뜩치 않았다. 무엇보다 사람을 얕보고 놀림조로 일컫는 굴지기라는 호칭이 싫었다. 물려받은 땅마지기가 없어 살림은 팍팍했지만 우리 가족에게도 엄연히 택호가 있고 이름이 존재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동네 코흘리개까지 “굴지기네, 굴지기 아들, 굴지기 딸”로 불렀으니 말이다.
우리 가족이 도매금으로 멸시를 당하는 것은 못난 굴지기 아버지를 둔 탓이라는 생각이 굳어지자 굴지기라는 주홍 글씨가 내 어린 가슴에 화인으로 박혔다. 오죽하면 가방끈이 짧은 당신은 굴지기가 딱 어울린다고 여겼을까. 이쯤 되니 볼품없는 누런 작업모에 기름때가 짜르르한 군청색 작업복을 걸친 아버지의 후줄근한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이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것도, 터널 경비가 아버지의 자존심이고 우리 가족의 생사여탈권을 쥔 목숨 줄이라는 것도 그때는 몰랐다. 존경이 없으니 살가울 리가 있겠는가. 가끔 마주하는 밥상머리에서도 부자간의 따듯한 대화는커녕 서로 눈을 맞추는 일도 드물었다. 황금색 금테 모자에 남청색 제복을 말끔하게 받쳐 입은 역무원 아버지를 둔 소꿉친구 금옥이가 얼마나 부러웠던지…….
고등학생이 되어 대구로 통학을 할 때다. 토요일 하굣길이었다. 책가방을 열차 난간에 내려놓고 시원한 바람을 쏘이며 파노라마처럼 밀려나는 풍경에 혼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때다. 갑자기 기차가 굴속으로 빨려들었고, 순간 터널 천정에서 후드득 물줄기가 쏟아졌다. 비온 후에 종종 있는 일이다. 승강구 맨 아래계단에 매달려가던 승객이 놀라 뒤로 물러나면서 내 책가방을 걷어찼다. 가방은 손쓸 틈도 없이 터널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난감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아닌가.
그날 나는 생전 처음으로 아버지의 일터를 찾았다. 번듯한 사무실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터널 입구 벼랑 위에 까치둥지처럼 올라앉은 두어 평 남짓한 초소가 전부다.
그곳에서 24시간 교대근무를 하면서 사람이나 동물들의 터널 접근을 막고, 오가는 열차마다 흰 깃발을 흔들어 안전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는 오전과 오후 하루에 두 번 남폿불을 켜들고 상, 하행선 터널을 왕복하며 순찰을 돌았다. 그런 사실조차도 그때 알았다.
기가 꺾인 아들이 딱했는지 아버지는 뜻밖에도 야단을 치지 않았다. 몸 비빌 틈도 없는 완행열차의 애환을 짐작하고 계셨으리라. 불빛이 새 나가지 않도록 앞쪽으로만 빠끔하게 트인 남폿불을 켜든 아버지는 턱짓으로 따라오라는 시늉을 하고는 굴로 향했다. 불빛 한 점 없는 터널 안은 굴뚝 속을 방불케 했다. 당시만 해도 아침저녁으로 운행하는 통학 열차는 허연 석탄 연기를 산더미처럼 뿜어내는 증기 기관차였으니 쏟아내는 그을음이 오죽했으랴. 디젤 기관차 역시 적잖은 매연을 뿜어내고 다녔다.
굴속은 서늘했지만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매연 때문에 재채기가 나올 정도로 목이 칼칼했다. 어려움은 또 있었다. 보폭과 침목의 간격이 맞지 않아 걷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 틈에서도 아버지는 침목의 훼손과 레일을 고정하는 코일 스프링의 파손여부를 꼼꼼히 살피며 걸었다. 기차가 오면 벽체에 파 놓은 보호구에 몸을 피했다가 다시 걸었다.
책가방을 찾아 반대편 터널로 돌아오자 온몸이 시든 배춧잎처럼 축 처지고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종일 초소에 붙박이가 되어 꾸벅꾸벅 졸다 오는 게 아버지의 일상이라고 여겼던 못난 아들이 부끄러웠다. 평생 컴컴한 굴속을 누비며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어둠 끝에는 반드시 빛이 있다는 희망, 아니면 굴비처럼 엮인 오남매 건사로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살림에 대한 절망이었을까. 어쩌면 무능과 가난을 자책하는 비통함에 절규했는지도 모른다.
그제야 철이 드는 것일까. 그날 이후 나는 아버지를 다시 보게 되었다. 음지에서 묵묵히 세상을 바꾸는 것이 철(鐵)이다. 그래서 쇠는 차갑지만 그 속은 따뜻하지 않는가.
침목에 굳건하게 뿌리를 박고 뻗어있는 철길은 누운 자리를 원망하지 않지만 견뎌내는 고통은 묵직하다. 제 살을 깎아내면서도 꿋꿋이 그 자리를 지키며 수만 톤이나 되는 육중한 기차의 무게를 거뜬히 감당한다. 생명이 없는 물상도 함께하면 닮는 것일까.
철길과 평생 생사고락을 같이한 아버지의 삶도 그랬다. 가족에게조차 멸시를 받았지만 한마디 불평 없이 묵묵히 소임을 다했다. 숨겨진 그 살뜰한 희생으로 우리는 안전하게 기차여행을 즐길 수 있지 않는가.
대학 입학 예비고사가 목전에 있을 때다. 갑자기 금옥이네가 이사를 갔다.
여객전무로 승차하여 밖을 나돌던 그녀의 아버지가 노름에 빠져 풍비박산이 난 것이다.
땅을 다 팔아도 빚이 남는다고 이웃들이 수군거렸다. 잘 돼서 떠났으면 좋으련만 금옥이가 딱해 가슴이 아팠다. 겉과 속이 다른 그녀의 아버지를 보면서 굴지기 아버지를 둔 내가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장 아닌 막장에서 매일 탄가루를 마시면서도 아버지는 그 일을 천직으로 알고 그곳에 뼈를 묻었다. 내가 살아오면서 힘든 고비를 넘길 때마다 일생 외길만 고집하신 아버지를 떠올리면 거뜬히 견뎌낼 수 있었다.
유년시절, 누구나 그랬듯 내게도 기차는 희망이고 설렘이었다. 기적소리만 들어도 어디론가 기차를 타고 멀리 떠나고 싶은 충동에 온몸이 전율했다. 밤차의 유혹은 더했다.
그 길 끝에 있을 유토피아를 떠올리며 늘 환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래서일까 돌이켜보면 철도가 주는 아버지의 녹봉으로 먹고 입고 자고 대학을 다녔다. 통학 열차에서 무지갯빛 꿈을 키우고, 철도 가족의 무임승차권으로 기차 여행을 즐기면서 세상 살아가는 법을 배웠으니 나를 키운 건 8할이 철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세월이 무더기로 흘러간 지금, 아버지의 흔적이 묻어있는 남성현역에는 이제 상, 하행선을 합쳐 하루 7회 무궁화호만 잠시 머물다 간다. 타고 내리는 승객이라야 종일 열네댓 명, 물론 굴지기도 없다. 대낮처럼 훤하게 불이 밝혀진 터널에는 첨단 장비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패랭이꽃 같은 누이들을 싣고 덜컹거리던 사람냄새 가득했던 비둘기호, 구수한 봇짐장수들의 푸념과 넋두리, 왁자지껄한 군용 열차의 군가 소리도, 무임승차한 얌체 승객을 다그치는 역무원의 호각소리도 멎은 지 오래다.
“따끈한 계란이 왔어요. 심심풀이 땅콩과 오징어가 왔어요.” 기차간에서 주전부리를 들고 외치던 홍익회 판매원들의 목쉰 소리도 이제는 들을 수 없다. 내 기억 저편에 남아있는 한 점 편린일 뿐이다.
터널속의 매연을 오랫동안 마신 탓이리라. 아버지는 폐가 좋지 않아 늘 기침을 달고 사셨다. 식구들의 끼니가 죽음을 부르는 분진보다 더 무서웠을 아버지, 결국 진폐증으로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생을 접었다. 밑바닥 삶이라고 하찮은 건 아니다. 평생 터널 바닥을 훑을망정 그 누구의 어깨도 밟고 일어선 적이 없는 아버지의 순수한 삶이야말로 진정 아름답지 않은가. 금수저가 되기보다는 고난과 역경을 딛고 행복에 한걸음 다가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닐까. 목석같았던 아버지는 비록 살갑지는 못했지만 내 가슴에 몸으로 때우는 직업의 숭고함과 낮은 자세로 살아가는 삶의 미학을 불립문자로 남기셨다.
아버지의 시간들로 가득한 터널을 빠져나온 고속열차가 탄식 같은 기적을 내뱉고 지나간다. 문 닫아걸고 기다림에 늙어가는 간이역이 아쉬운 것일까. 언젠가 내 영혼의 허기를 채우고 떠나갈 막차, 그 길 끝에는 아버지가 하얀 깃발을 흔들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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