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가지에 이는
맑은 바람 같은
도학자의 글씨

청송
성수침의
묵적

16세기에 접어들 무렵, 조선은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1498년 사초 문제로 발단이 된 무오 사화戊午士禍를 필두로 1504년 연산군의 생모 폐위 사건에 연루된 자들을 처형한 갑자사화甲子士禍, 1506년 광해를 폐위한 중종반정과 1519년 사림 파와 훈구파의 대립으로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 1545년 대윤과 소윤의 싸움으로 파생된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이르기까지 50년이 채 안 되는 동안 사대사화四大士禍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수많은 조선의 선비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멀리 유배를 당하는 등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이런 정치·사회적인 파란을 몸소 체험한 선비들은 과거를 통한 출사의 뜻을 접고 산림에 은거하며 학문에만 전념하는 등 자신의 수양과 실천에 매진하는 산림처사山林處士로 생애를 마치는 이가 많았다. 당시의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서예가인 청송 성수침聽松 成守琛, 1493~1564의 서첩을 통하여 그의 삶과 예술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writer. 최견 서예가, 한국서화교육원장

출사를 마다하고 오직 학문에만 정진

청송은 태어날 때부터 기골과 행동이 범상치 않았으며 어려서도 의젓하기가 마치 성인과 같았다. 22세 때 부친상을 당하자 파주 향리에서 3년간 시묘를 했다. 새벽에 일어나 주변을 정갈하게 가꾸고 애잔하게 곡을 하며 하루에 세 번 상식(上食)을 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지나는 과객이 시를 한 수 지어 남기기를 “성씨 집안의 두 아들은 효행이 지극해 그대 가문을 대대로 이어가는구나” 했다.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 1482~1519)의 문하에서 공부할 때 이미 두 형제는 학문에 힘쓰는 선비로서 장차 대성할 것이라 예견되어 세상에 일찍이 이름이 알려졌다. 이때 같은 문하의 임억령, 조식, 서경덕 등 학우들과도 두루 교류하였다.
1519년 일어난 기묘사화로 자신을 그토록 아껴주던 스승 조광조가 갑자기 생을 마치자 두문불출하며 세상과는 담을 쌓았다. 이때가 청송의 나이 27세였다. 어느 날 백악산(현 북악산) 아래 유난동(幽蘭洞)으로 거처를 옮겨 청송당(聽松堂)이란 서실을 한 채 짓고 오직 대학과 논어 그리고 정주(程朱)의 서책 탐구에 전념하였다. 고인의 필법 연찬에도 게으름이 없었으며 특히 조선 초기부터 이어져 오던 원대 조맹부의 필체에 깊은 애정을 가졌다. 아울러 서예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왕희지의 글씨 연찬을 통해 깊이를 더했다.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파주의 우계(牛溪)로 옮긴 것은 49세 때였으며, 여기서도 오직 서책 탐구와 후학 지도에만 전념했다. 나라에서는 그를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예산(禮山)·토산(兔山)·적성현감(積城縣監) 등에 임명했으나 모두 사양하고 일체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전아하면서도 유려한 도학자의 품격

한 무게가 태일단에서 신령님께 빌 적에
신풍마을의 나무 빛은 만조백관을 둘러쌌네
어찌 알리오 오늘 밤 장생전이
빈 산에 달그림자 찬데 홀로 닫혀 있을 줄
(武帝祈靈太一壇 新豊樹色遶千官
那知今夜長生殿 獨閉空山月影寒)

이 시는 당대의 시인 고황(顧況)이 지은 ‘회고기행시(懷古紀行詩)’로 시인이 온천으로 유명한 섬서성(陜西省) 소응(昭應)에 머물면서 당 현종과 양귀비를 회고하며 세월의 무상함을 노래했다. 행서와 초서를 적절히 섞은 단아하면서도 유려한 글씨는 한 눈에 보아도 글쓴이의 기품이 함초롬히 드러난다. 청대의 서예가 유희재는 [서개(書槪)]에서 서예는 “붓의 본성과 먹의 정감을 표현하는데 이것은 모두 그 사람의 성정(性情)을 근본으로 하므로 서예는 곧 사람의 성정을 다스리는 것이 우선이다” 했다. 따라서 도학의 실천을 누구보다 중히 여겼던 청송의 글씨는 바로 자신의 철저한 성정 관리와 수련에서 비롯된 것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가문의 필맥을 잇다

조선 초 이래 명문으로 알려진 청송의 집안은 성석린, 성삼문, 성임, 성현 등 대대로 글씨에 뛰어난 인물이 많았으며 이러한 가문의 필맥을 청송이 잘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조맹부의 필의가 돋보이는 청송의 글씨를 보고 실학자 서계 박세당은 “그의 서법은 본래 원나라 오흥 출신의 서예가 조맹부로부터 나왔는데, 미려함은 본디 조맹부만 못하지만 기일(奇逸)하고 탈속(脫俗)함으로 말하면 조맹부보다 오히려 낫다”고 상찬했다.
향리 우계에서 만년을 보낸 청송은 정월의 찬바람 속에 생을 마쳤는데 향년 72세였다. 청빈을 몸소 실천한 청송은 장례 치를 비용조차 없어 나라에서 관과 쌀을 보낼 정도였다. 그의 슬하에는 우계 성혼이란 걸출한 자식을 두었다.
도도히 흐르는 임진강 물줄기를 벗하는 파주 땅에는 이름난 성현이 많이 배출되었다. 붓과 서책만을 벗하며 고고한 삶을 살다 간 청송 성수침. 그의 맑디맑은 성정, 세상을 꿰뚫는 철학과 학맥은 오늘날에도 굳건히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