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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CE

술을 빚던 공간에서 예술을 빚다

대만 화산 1914 문화창의산업원구

도시재생은 낡은 공간에 새 숨을 불어넣는다.
버려졌던 대만의 대형 양조장은 예술가와 시민, 관광객이 모이는 문화 공원으로 재탄생했다.

writer. 이하란

예술가들의 아지트가 된

폐양조장

화산 1914 문화창의산업원구(華山1914文化創意產業園區, Huashan 1914 Creative Park)는 과거 대만 최대 규모의 양조장 단지였던 곳에 예술을 입혀 새롭게 조성한 복합문화공간이다. 현재는 담배공장을 리모델링한 송산 문화창의원구와 더불어 대만의 가장 대표적인 도시재생 공간 중 하나다. 옛 건물을 철거하거나 재건축하지 않고 기존의 모습 그대로 보존한 것이 이곳의 매력이다.
이곳은 1914년 일제에 의해 지어져 해방 후에는 오랫동안 대만 정부에서 운영해왔다. 도심 한복판에서 70년 넘게 맥주와 과일주 등을 만드는 양조장으로 자리를 지켜왔으나 수질오염 등의 문제로 1987년 다른 곳으로 이전하게 된다. 이후 6천여 평에 이르는 넓은 부지가 10년 가까이 방치되었다. 그러다 1997년 한 극단이 이곳을 조금씩 개조해 연극 공연 장소로 활용하며 화제가 되었는데, 이후 주변 지역의 예술가들이 하나둘 이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는 예술가들이 공식 허가 없이 무단으로 장소를 점거한 방식이었기에 정부가 이들을 쫓아내며 예술가들과 정부 사이에 2년여간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다 1999년 대만 정부는 이곳을 문화예술특구로 공식 지정했고, 마침내 버려졌던 양조장 부지가 문화예술단체나 예술인들의 창작 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었다. 2002년에는 이곳이 대만의 도시재생 사업대상이 되었고, 2005년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면서 2007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지역의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하게 됐다.
현재 화산 1914에서는 대형 전람회 등 각종 전시와 공연, 행사가 다양하게 이뤄진다. 독립 영화관이 있어 예술영화를 상영하기도 하고, 다채로운 소품과 예술품을 구경할 수 있는 플리마켓이 열리기도 한다. 도심 속 녹지 공간에 오래된 건축물이 어우러진 모습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 각종 화보와 뮤직비디오 촬영지가 되기도 하고, 타이베이 시민들의 웨딩 촬영지로도 사랑받는다. 다양한 공예품 가게와 카페, 레스토랑 등 상업시설도 갖추고 있어 현지인들은 물론 한국인 관광객도 많이 찾는 핫플레이스다.

과거와 현재,

자연과 예술이 공존하는 공간

화산 1914는 예술가들이 들어오며 완전히 새로운 용도의 공간으로 탈바꿈했지만 건물들의 외관은 낡고 오래된 옛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내부는 현대적 감성에 맞게 리모델링하면서도 건물 자체의 형태는 근대유산으로서 훼손 없이 보존한 것. 덕분에 세련되면서도 빈티지한 레트로풍의 분위기로 젊은 층들의 취향을 저격하고 있다. 화산 1914 내 공간들은 누구나 문화예술 용도로 대관할 수 있지만 내부는 자유롭게 활용하되 건물 외관은 바꾸지 않는 것이 규칙이다.
건물뿐 아니라 주변의 자연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고 공간을 만든 것이 이곳의 또 다른 특색이다. 그래서 공원 전체에 예술과 자연, 사람과 건축이 조화롭게 공존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무렇게나 칠이 벗겨진 외벽 위로 예술가들의 벽화가 어우러진 모습이나 무성한 덩굴 식물이 건물 벽을 빼곡히 감싼 모습 등이 화산 1914만의 독특하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이처럼 화산 1914가 100년이 넘은 근대 건축물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면서 자연과 어우러진 문화 공원으로 개발될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을 조성하는 데 시민들의 의견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덕분이다. 화산 1914는 대만 정부가 소유한 국유지이자 정부와 민간단체가 함께 만든 공간이다. 정부 소유의 부지를 민간에 임대하는 방식으로 개발해 운영하고 있다. 시민사회가 문화지구 개발의 세부사항을 주도한 덕분에 보다 창의적이고도 시민의 눈높이에 맞춘 공간으로 조성될 수 있었다.
  • 개성 넘치는 수공예품의 천국

    대만의 도시재생 사업으로 조성된 화산 1914는 이 안에서 예술을 실생활과 접목한 메이커스(Makers) 문화가 발현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메이커스 문화는 DIY(Do-It-Yourself) 문화의 확대 개념으로, 기업에 한정되어왔던 메이커 개념에서 벗어나 개인이 스스로 창의적인 제품과 콘텐츠를 제작하는 문화를 말한다. 이곳에서 예술가들은 직접 만든 각종 수공예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면서 소비자들을 만난다.

    화산 1914 골목골목에는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곳곳에 숨어있어 예술가들의 공예품부터 감각적인 디자인 제품, 대만 관련 기념품까지 다양한 소품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은 방문객으로 붐비는 곳은 온갖 종류의 나무 오르골 제품으로 가득한 우더풀 라이프(Wooderful Life)라는 상점이다. 눈에 띄는 간판은 없지만 기분 좋은 오르골 소리가 먼저 사람들의 발길을 멈춰 세운다. 대만 여행 기념 오르골을 구입하기 위해 화산 1914에 일부러 들르는 여행객도 있을 만큼 많은 사랑을 받는 이곳의 명소다. 가게 한쪽에는 방문객이 직접 재료를 골라 나만의 오르골을 만들어볼 수 있는 DIY 체험 공간도 마련돼 있다.
    우더풀 라이프뿐 아니라 화산 1914에는 방문객이 직접 메이커가 되어 공예품을 만들고 체험해볼 수 있는 공간이 여러 곳 있다. 문화와 예술을 그저 관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욱 적극적으로 즐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앙증맞은 소품과 공예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쯤 들러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