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왕의 소임을 빈틈없이 수행하고자 했던 정조(正祖, 1752~1800)는 정치·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개혁의 물결을 일으켰다. 유능한 신진학자들을 등용해 방대한 편찬사업을 독려했고 정치적 인물 등용에도 당 색을 가리지 않는 탕평을 근간으로 했으며 서얼을 타파해 북학파를 키우는 가운데 경제 부흥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군사적인 힘을 기르는데 각별한 관심을 가졌으며 이를 통해 왕권 강화에도 힘썼다. 다방면에 걸친 이 같은 개혁 활동이 있었기에 정조는 조선의 가장 유능한 왕 중 한 사람이었다는 칭송을 들었으며 영조 대를 포함한 이 시대를 조선의 사회문화가 가장 부흥한 시기라고 일컫기도 한다. 정조는 시, 서, 화에도 남다른 소양을 가진 군주였다. 여기서는 군왕의 기품과 필치가 가장 잘 드러나는 그의 글씨 [증철옹부백부임지행(贈鐵甕府伯赴任之行)]을 통해 간단히 그의 삶과 예술세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시련을 딛고 펼친 새로운 세상

정조는 첫돌을 맞았을 때 “돌상에 차려진 수많은 노리갯감은 하나도 거들떠보지 않고 그저 다소곳이 앉아 책만 펴들었다.”고 전해질 만큼 어려서부터 유난히 책을 좋아했다. 8세 때 왕세손으로 책봉되어 11세 되던 해 2월에 청풍 김 씨와 가례를 올리며 만인의 축복을 받았으나 이도 잠시였다. 그해 5월 생부 사도세자가 할아버지인 영조의 노여움을 받아 창덕궁 문정전 뜰에서 뒤주 속에 갇혀 죽임을 당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했다. 24세 봄, 영조의 병이 악화하자 세손으로서 대소사를 대신 처리하며 군왕의 업무를 익혀나갔고, 이듬해인 1776년 3월 영조가 승하하자 정조는 25세의 나이로 조선의 제22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 2년에는 조선의 두꺼운 신분의 벽을 허무는 서얼허통(庶孼許通)의 신칙을 발표했다. 열한 살 때 피눈물로 아비의 죽음을 맞이했던 정조는 즉위 13년이 되어서야 그 아비의 한을 풀기 위해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으로 천장한 후 이를 현륭원(顯隆園)이라 명명했다. 정조 17년에는 채제공을 수원 유수로삼아 화성(華城)의 조성사업을 주관토록 하고 다산 정약용이 설계를 맡아 2년여만인 정조 20년 8월에 완공하였다.

재임 중 정조는 화성 행궁을 13차례나 다녀왔다. 행궁 때는 신하들에게 특별히 명하여 구경나온 수많은 백성이 부복 없이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글을 아는 자는 문서로, 글을 모르는 자는 격쟁 등을 통해 어려운 사정을 탄원할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처리한 민원이 3천 건이 넘었다.

필묵에 담긴 군왕의 위엄과 학덕

<철옹성의 부사로 부임하는 행차에 드림>

만 길 높이 우뚝 솟은 철옹성 / 높이 열린 성문은 부사가 가는 길 / 강동은 멀지 않고 성도는 가까워 / 익숙한 길 가벼운 수레로 가는 / 그대 행차를 전송하노라

위는 정조의 자작시로 철옹성 즉 영변부사(寧邊府使)로 떠나는 서형수(徐瀅修)에게 작별의 정을 오롯이 담았다. 영변은 평안도 북부에 있는 험준한 산악지대로 병자호란 때 청의 군사를 물리친 요새다. 그 지형이 ‘쇠로 만든 옹기’와 같다 하여 철옹산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정조의 어필은 비록 행서지만 마치 해서를 쓴 듯 반듯반듯한 장방형의 자태를 갖추고 있으며 이는 장창을 든 군사들이 대오를 갖추고 장수의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진군을 하는 듯하다. 필획은 매우 굳세면서도 시원스러운 결구를 하고 있어 행서로서의 유려한 아름다움도 깊숙이 함축하고 있다. 전체적인 포치 또한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으니 근엄한 군왕의 위엄이 필묵의 동세와 너무나 잘 어우러진다.

지면은 가로가 73cm, 세로가 2m나 되는 대형 화폭으로 왕실이 아니면 감히 사용하기 힘든 종이다. 이런 곳에 스스럼없이 일필휘지하며 전체를 빈틈없이 처리한 완벽한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이렇듯 창윤한 먹색과 적절한 농담까지 잘 갖추어 놓았으며 돈실웅혼(敦實雄渾)한 필세가 장중하게 펼쳐져 있다. 하여 왜 그가 조선의 왕으로서 우리나라 서예사에 새로운 한 획을 그은 사람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증철옹부백부임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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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철옹부백부임지행

못다 이룬 꿈

왕위를 계승한 뒤 정조는 화성 축조와 행궁이란 독특한 행태로 부모에 대한 효를 다하면서도 군사력의 양성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백성들의 삶의 현장을 직접 보며 그들의 어려움을 듣는 애민을 바탕으로 나라 살림을 구석구석 챙겨나갔다. 재위 24년 되던 해원자를 왕세자(뒤에 순조)로 책봉하는 왕실의 경사스러운 일이 있었고 그해 5월 신하들에게 왕의 의리에 순응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는 ‘오회연교(五晦筵敎)’를 발표했다. 이로 인해 군신 간의 암묵적인 갈등이 고조될 때 종기를 치료하던 정조가 갑자기 붕어했다. 세속 나이 불과 49세,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영남 남인들로부터 제기되었던 노론에 의한 정조의 독살설은 지금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지만 그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을 몸소 실천하며 학자 군주로서 만백성을 사랑하고 새로운 나라의 이상을 꿈꾸어 오던 만천명월옹주인 정조. 대선정국을 맞아 대권을 쥐겠다는 인사마다 나만이 나라를 바르게 살릴 수 있는 지도자라고 소리치고 있는 요즈음 온 나라를 보름달 같이 밝게 비추던 한 어진 임금이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