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英祖) 연간에 활동하며 초상화를 잘 그려 ‘국수(國手)’라는 칭호를 들으며 도화서 화원으로서 동물 그림으로 명성을 날린 이가 화재 변상벽(和齋 卞相璧, 1730~1775)이다. 그에게는 아호를 부르기보다 그가 즐겨 그리던 동물의 이름을 따와 “변고양이(卞猫)” 또는 “변닭(卞鷄)”이라 부르는 경우가 더 잦을 정도였다. 여기서는 화재의 동물화 중 치밀한 형사와 필치가 가장 빼어난 [자웅장추(雌雄將雛)]를 통해 그의 삶과 예술세계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도화서 화원으로 남다른 세간의 인기를 누림

화재의 성장기 기록은 알 수 없으나 같은 시대를 살았던 정극순(鄭克淳)이 쓴 [연뇌유고(淵雷遺稿)]에서 ‘변씨화기(卞氏畵記)’라는 변상벽의 전기를 보면 그가 왜 새와 동물을 대상으로 하는 영모화에 천착했는지를 알 만하다. “나 또한 산수화를 배웠지만 이것으로는 지금의 화가를 압도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사물을 골라서 연습하는 데 열중했습니다.”고 그 연유를 적고 있다.

화재가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한 시기는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에게 시호를 주고 원을 조성한 것을 기념해 제작한 ‘상시봉원도감의궤(上諡封園都監儀軌)’에 참여했던 1755년으로, 화재 나이 26세 때다. 2년 뒤인 1757년에는 ‘인원왕후국장도감의궤(仁元王后國葬都監儀軌)’ 제작에 참여했다. 그는 초상화도 잘 그려 주변 사대부로부터 많은 그림 부탁을 받았다. 당대 화재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는 것으로 앞의 [연뇌유고]에서 보면 “위항인 변 씨는 약관에 고양이 그림에 능하여 한양에서 명성을 날렸다. 여러 종실과 귀인들이 그를 찾아와 길에서 만나더라도 거절하고 달아나버렸다.”고 밝히고 있다. 화원 화인에게 가장 큰 영예인 어진 제작에는 두 번이나 참여했다. 33세 때인 1763년과 44세 때인 1773년 영조 어진을 제작했으며, 특히 두 번째는 김홍도, 신한평, 김후신, 김관신, 진응복 등 당대에 이름난 화사들과 함께했다. 이때 주관 화사를 화재가 맡는 등 도화서 화원 중에서도 아주 비중 있는 위치에 있었다.

화재변상벽자웅장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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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변상벽자웅장추

정교한 필치로 이룬 신운의 경지

연녹색 전원에 따뜻한 봄날의 전경이 평화로운데 꼬꼬 가족이 저마다의 동작에 심취해 있다. 암탉이 병아리를 거느리고 있으니 이들의 부화시기를 감안해 볼 때 시절은 3~5월쯤으로 짐작된다. 먼저 우측에 있는 암청색의 수탉을 보자. 한눈에 보아도 그 위용이 예사롭지 않을 정도로 주변을 압도하고 있다. 수놈의 위세를 나타내는 벼슬을 검붉게 치켜세우고 날카로운 주둥이와 고기수염을 아래로 드리운 모습에서 다른 녀석들은 감히 근접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는 마치 오만과 위용을 함께 갖춘 황제와 같은 녀석으로 착각할 정도다.

좌측에 대칭으로 있는 회갈색 암탉은 인자스럽기 그지없다. 연분홍의 짧은 벼슬과 자애로운 눈빛에는 절로 모성애가 가득해 보인다. 꿀벌이라도 되는지 입에는 벌레 한 마리를 물고 있어 병아리들이 종종걸음으로 모여든다. 병아리들은 모두 아홉, 앙증스러우면서도 다양한 몸짓과 보드랍게 느껴지는 어린 병아리들의 솜털 같은 질감은 손으로 쓰다듬고 싶을 정도의 현실감을 준다. 수탉 뒤에 웅크리고 있는 흰 닭은 수탉의 곁에 바싹 붙어 있는 낌새가 마치 그의 애첩이라도 되는 모양새다.

이렇듯 꼬꼬 가족의 성품과 역할에 맞춘 화면 구성과 함께 짙은 암청색의 수탉, 백색·회갈색의 암탉, 노란 병아리들의 색상을 통한 전체적인 어울림과 섬세한 붓질 속에서도 멈칫거림 없이 생동감 있게 담아낸 필치는 화재가 빼어난 자질의 화인이었음을 여실히 증명한다. 아울러 그가 왜 닭과 고양이 그림의 명수라 불렸는지는 이 한 점의 그림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이제 좌측 상단의 화제를 보자. 같은 시대 내지는 후대 화가로 보이는 양촌 마군후(陽村 馬君厚, 생몰 미상)의 행초서가 시원스럽게 적혀있다.

흰 털 검은 뼈로 무리 중에 홀로 빼어나니

기질은 비록 달라도 오덕이 있으며

의가의 처방을 듣고 묘약을 지어야겠는데

아마 인삼과 삽주(백출)를 함께해야

기이한 공훈 세우겠지

(白毛烏骨獨超群 氣質雖殊五德存 聞道醫家修妙藥 擬同蔘朮策奇勳)

양촌이 보기에는 그림 속의 어느 녀석이 아마 오골계로 보이는 모양이다. 여기에다 닭이 가지는 다섯 가지 덕성이 있다고 한껏 치켜세우더니 의인의 처방을 받아 인삼과 삽주를 넣고 끓이겠다 하니 이는 요즈음의 삼계탕이 아닌가. 점잖은 그림에 양촌의 해학이 여기에 이르니 그의 인물됨이 더욱 궁금해질 따름이다.

평생을 초상화와 영모화에만 천착

수줍음이 많았던 화재는 말마저 어눌하여 누구와 어울리는 일은 탐탁지 않게 여기며 술자리마저 가림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그는 닭이나 고양이의 관찰과 묘사에만 집중하여 전해지는 유작 34점 중 고양이가 15점, 닭이 14점으로 월등한 비중을 차지한다. 또한 화재가 평생에 걸쳐 전념한 그림은 섬세성과 치밀함이 가장 요구되는 초상화인데 그가 평생 1백여 점이 넘는 작품에 임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3점밖에 전해지는 것이 없다.

어진 제작에 참여한 공으로 1773년 곡성 현감에 나아갔던 화재는 2년 정도 지방 수령의 임무를 수행하던 중 어느 봄날 알 수 없는 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향년 46세의 짧은 삶이었다. 화재를 비롯한 수많은 화원들을 길러낸 조계사 앞 도화서 터엔 유허비(遺墟碑) 하나만 말없이 서 있다. 화재 변상벽, 그가 평생 즐겨 그리던 동물 그림의 주인공들은 이 봄날에도 따뜻한 눈망울과 귀여운 몸짓으로 우리들을 반겨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