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대로부터 내려온 가학(家學)의 전통을 이어오며 경학(經學)과 시문(詩文)에도 탁월한 재주를 가졌던 옥동 이서(玉洞 李漵, 1662~1723)는 오랜 서예 이론과 실기를 통한 경험을 집약해 [필결(筆訣)]이란 이론서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향토색 짙은 자신만의 서체를 창안했다. 당대의 세인들로부터 높은 평판을 듣던 그의 글씨는 그의 아호를 따서 ‘옥동체(玉洞體)’라 불렀고 이것이 바로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시조라 불리게 된 연원이다. 훗날 백하 윤순과 원교 이광사에게 이어지는 동국진체는 조선후기 서예사에 새로운 획을 긋게 된다. 여기서는 옥동의 대표 유작 중 그의 호방한 성품과 향토색이 물씬 풍겨 동국진체의 진수로 불릴 만한 초서오언시 [낙일하평초(落日下平楚)]를 통해 그의 삶과 예술세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학문에만 전념한 은일지사(隱逸志±)
유년기의 옥동은 어머니가 천자문을 읽어주면 천지의 이치와 일월의 운행은 물론 음양풍우(陰陽風雨)의 변화에 대해 꼬치꼬치 물어와 모친이 말문이 막힐 정도로 학문적 자질이 남달랐다. 17세 때 초계 정 씨 정약(鄭鑰)의 딸과 혼례를 치렀다. 같은 해 8월 생부인 이하진이 진위겸진향사(陳慰兼進香使)로 중국 연경을 다녀오면서 수많은 서적과 아울러 왕희지의 해서(楷書) 서첩(書帖)인 [악의론(樂毅論)]을 구해다 줌으로써 그는 이를 자신의 강학과 필법 연구의 소중한 자료로 삼았다.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대거 몰락할 때 그의 부친도 파직을 당해 평안도 운산(雲山)으로 귀양가는 신세가 되었다. 이런 와중에 운산에서는 생부의 두 번째 부인인 안동 권 씨가 옥동의 막내 동생이자 훗날 실학사상의 태두로 불리는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을 출산하였다.
이런 정치적인 격랑을 몸소 겪은 옥동은 이후 포천(抱川) 옥금산(玉琴山) 청량포(淸凉浦)에 은거하며 자호를 ‘옥동(玉洞)’이라 하고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만 전념했다. 아울러 금강산 만폭동에서 벼락 맞은 오동나무로 제작한 거문고를 ‘옥동금(玉洞琴)’이라 부르며 거문고 가락으로 심저의 울분과 세상의 근심을 달랬다. 특히 공재 윤선도(恭齋 尹善道)와는 금란지교(金蘭之交)로 불릴 정도로 40여 년간 돈독한 우정을 나누었다. 두 사람은 경학과 시문, 역사 등의 논의는 물론 영자팔법(永字八法)의 서예이론에 이르기까지 깊은 학식을 주고받았으며 공재는 자신의 자녀들 교육마저 옥동이 전담하여 가르치게 할 정도였다. 이런 우정도 1715년 48세의 나이로 공재가 갑자기 운명함으로써 끝을 맺었으며 이때가 옥동의 나이 54세였다.
옥동이서(성호박물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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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동이서(성호박물관1)
둥근 듯 모난 듯 원융무애(圓融無礙)한 필치
지는 해가 초나라 평원에 펼쳐지니(落日下平楚)
외로운 연무가 동정호에 일어나네(孤烟生洞庭)
노래 끝나니 사람은 보이지 않고(曲終人不見)
강 위엔 여러 봉우리 푸르다네(江上數峰靑)
-옥동이 아들에게 주기 위하여 쓰다(玉洞書與子)
모두 스무 자로 이루어진 5언 시이지만 천리마가 한달음에 달려온 양 매우 빠른 행필(行筆)의 속도감이 서축(書軸) 전체를 압도하고 있으며 둥근 듯 모나며 모난 듯 둥근 자형들이 서로 어우러져 한판의 춤사위를 펼쳐 놓은 듯하다. 첫 연은 4자를, 둘째와 셋째 연은 5자 모두를 이어 씀으로써 서의 흥취(興趣)를 우선시하는 광초(狂草)의 전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나하나의 자형(字型)은 모두가 듬직한 무게감을 갖추고 있지만 좌우와 상하간의 어우러짐이나 행필의 굵고 가늠 모두가 행운유수(行雲流水)와 같이 자연스럽다.
동양사유의 근간에서 음양의 상생과 조화를 통하여 천지자연의 생명력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으로 보듯이 서예에서는 하나의 점과 획이 어우러져 이런 생명력이 구현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서예의 점과 획에는 인간의 희, 노, 애, 낙이 적절히 담겨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주역(周易)의 논리로 서예를 판단한 옥동은 주역의 건괘(乾卦)가 나타내는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 구한다.(同聲相應 同氣相求)”는 이치를 자신의 창작에도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잘 투영하고 있다.
필묵의 흥취와 거문고 가락에 맡긴 삶
평소 말수가 적었던 옥동이었지만 경학을 강의하거나 강론을 펼칠 때는 우렁찬 언변이 강물처럼 흘렀으며 그 기개 또한 준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편 그는 평생에 걸쳐 1300여 수의 시문을 남길 정도로 뜨거운 문학적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서예술의 이론 연마와 창작에 몰두하며 거문고 가락으로 취흥을 달래던 은일지사(隱逸志±) 옥동은 옥동산사(玉洞山舍)에서 회갑연을 연 이듬해 거문고 현이 끊어지듯 홀연 세상을 떠났다. 향년 62세였다. 사후 그의 문인(門人)들은 옥동을 ‘홍도선생(弘道先生)’으로 사시(私諡-사적으로 붙이는 시호)했으며 생전에 옥동이 아끼던 옥동금은 오늘날 안산의 성호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옥동 이서가 남긴 최초의 서예이론서 [필결]은 서예의 획과 자형을 학문적으로 탐구한 서책으로 우리나라 서예이론의 시금석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창안한 주옥같은 조선풍의 행초서는 우리네 전통의 감흥이 솟아나는 새로운 서체로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시원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