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이름난 화인(畵人)으로 우리는 흔히 겸재, 현재, 공재 또는 관아재를 3재(三齋)로 그리고 단원, 혜원, 오원을 3원(三園)으로 부르는데 흥미롭게도 삼재 3인은 선비 집안 출신이고 3원은 모두 중인 집안 출신으로 보인다. 따라서 삼재의 특성 역시 선비화가로서 다소 이론적이면서도 격조 있는 그림에 주안점을 두는 점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이러한 3재 중 관아재의 그림에서 해학적이면서도 그의 작가정신과 예술세계가 가장 잘 나타나는 [현이도((賢已圖)]를 통하여 그의 삶과 예술세계를 더듬어보고자 한다.
화인(畵人)이기를 거부했던 화인
유복한 사대부가의 자제답게 관아재 역시 유학(儒學)에 뜻을 두었지 화가로서의 꿈은 애초에 꾸지 않았다. 그러나 타고난 천품과 주변의 분위기 탓에 그림과의 인연은 어쩔 수 없이 깊어만 갔다. “어느 날 지촌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있을 때 우암 송시열의 초상을 보고 무심코 백지에다 초(抄)를 해보았더니 주변 친구들로부터 아주 닮았다는 칭찬을 받았지만 지촌 선생만은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말라. 훗날 반드시 난처한 일이 생기리라’ 하셨다.”고 [관아재고(觀我齋稿)]의 만록(漫錄)에 전한다.
대과를 거치지 못한 관아재가 처음 출사한 것은 33세 때로 첫 벼슬이 장릉참봉이었다. 비록 높은 자리는 아닐지라도 사헌부감찰, 사복시주부, 의금부도사, 이조좌랑 등의 내직을 거쳐 43세에 제천현감으로 나아갔던 관아재는 아끼던 맏아들 중희가 스물하나의 나이에 갑자기 숨지자 현감자리에서 물러나 한양으로 돌아왔다. 지천명의 나이에 의령현감에 부임했을 때 조정에서는 세조어진 모사를 위해 관아재를 한양에 다시 올라오도록 명했으나 선비가 직접 그림을 그릴 수 없다며 복명하지 않아 수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파직되었다. 이렇게 인생 최대의 고비를 맞았던 관아재는 3년 뒤 영조의 은덕으로 안음현감으로 나아가 6년의 임기를 무난히 마쳤다. 쉰여덟, 백발의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온 관아재는 그림에만 몰두하며 사천 이병연, 겸재 정선 등과 함께 옛정을 나누고 예술관을 논하며 흥겨운 시절을 보냈다. 인생의 황혼에 이른 63세에 또 한 번 난감한 일이 터졌다. 영조로부터 숙종 어진 모사의 명을 받고 “기예(技藝)를 가지고 위를 섬기는 사람은 고향을 떠나 사류(士類)의 반열에 끼지 않는다 하였는데 신이 어찌 기예를 가지고 위를 섬길 수 있겠습니까.”(조선왕조실록 영조 24년) 하며 임금의 명을 또 거절한 사건이었다. 이때 우승지 이성중이 관아재를 무겁게 심문할 것을 청했으나 문예를 사랑했던 군주답게 영조가 문초하지 말라고 명함으로써 고비를 무사히 넘겼다.
세련된 필치로 재현한 현장의 생동감
때는 매미들이 목청껏 울어대는 한 여름. 푸른 소나무 그늘 아래 잘 어우러진 장기판이니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이야기가 딱 맞는 것 같다. 말들이 몇 안 남은 것으로 보아 대국은 막바지에 다다른 듯 오른쪽 선비는 막 자리를 털고 일어날 기세다. 사방건을 쓴 왼편의 선비는 외통수에 몰린 듯 장기알만 매만지고 있는데 바로 옆의 탕건을 쓴 선비는 어떡하든 이를 모면하는 수를 찾아보려는 듯 더욱 진지하게 판을 노려보고 있다. 갓 쓴 선비는 아직 사태 파악이 안 되었는지 부채 너머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자리를 차고 일어선 총각은 그 수도 못 읽느냐는 듯 헛부채질로 장기 두는 이의 조급증을 더욱 키우고 있다. 맨 앞쪽의 사방건을 쓴 선비는 쌍륙과 바둑통을 가지런히 챙기면서 짐짓 겉으론 태연하게 있지만 속내는 장기판이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심사다. 더위에 지친 선비들이 잠시 서책을 밀쳐놓고 일탈에 빠진 모습이 해학적이면서도 천연덕스럽게 그려진 그림이다. 마치 관아재 자신의 모습을 그린 듯 한양 선비들의 세련된 옷차림과 정교하면서도 고아한 자태가 잘 드러나며 우아한 채색에도 멋스런 선비들의 아취가 담겨 있다. 좀이 먹어 깨진 글자가 있기에 온전히 읽기 어려운 화기(畵記)이지만 유려한 필치의 행서 내용은 대강 이렇다.
관아재조영석현이도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옥동이서(성호박물관1)
성중(김광수)이 유령의 ‘팔준도’와 (成仲以兪齡八駿)
여기가 그린 두 그림으로 (呂紀寫生二軸)
나에게 ‘현이도’를 구하며 (求余賢已圖)
우군(왕희지)이 거위와 바꾼 고사를 쓰니 (用右軍換鵝故事)
즐겁게 이를 그린다 (遂樂而作此)
성중은 곧 상고당 김광수의 자(字)로, 당시의 최고 감식가이자 수장가였던 그가 중국에서 구한 그림 두 점을 내놓으며 관아재에게 그림을 요청한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관아재의 그림을 매우 귀하게 여겼던 것으로 짐작되며 관아재 또한 최선의 필치와 정성을 다했음은 불문가지다.
우리는 그를 화인이라 부른다
관아재는 매우 심지가 굳고 개결한 선비였다. 평생 붓을 들고 살면서도 스스로 화인이기를 거부했던 그는 임금의 명도 거부하지 않았던가. [현이도]에 있는 김광국의 발문을 보아도 “관아재는 문장의 멋이 풍부하고 그림에 오묘한 뜻이 들어 있어 사람들이 이를 구하고자 해도 번번이 사양하고 그리지 않았으니 모든 게 사람들이 화사로 볼까 두려워한 이유다.” 할 정도로 관아재는 철저하게 선비로 남기를 바랐다. 관아재가 서민의 일상을 화폭에 열심히 담기 시작한 것도 지방관으로 있을 때부터다. 주부, 장인, 농부, 승려 등의 고단한 삶의 모습을 따스한 성정으로 살펴본 후 이를 가감 없이 화폭에 담아냈다. 이로써 그는 조선풍속화 내지는 인물화에서 새로운 영역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후대 화인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관아재 조영석, 이 시대에 사는 우리는 부득이 그를 화인으로 부를 수밖에 없지만 그가 남긴 주옥같은 그림들은 조선의 색채와 향훈이 짙게 묻어나는 명품으로 우리에게 울림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