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가 천천히 묵호역으로 들어왔다. 직전 역인 동해역으로부터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조금 넘게 걸렸다. 우리가 탄 기차는 시속 0.2km, 사람이 걷는 속도보다 느리게 움직이는 슬로 트레인이니까. 우리에겐 행선지도 도착지도 없다. 역사는 우리가 어디쯤 지나고 있는지 알려주는 표지판이다. 어디서든 살짝 올라타면 될 정도로 열차는 천천히 움직이고 있으니까.
고속 열차를 기억하고 있는 엄마는 기차가 굼벵이가 됐다고 표현하곤 했다. 근데 빠르게 달리는 기차에 살면 머리가 아플 것 같다. 상상만 해도 멀미가 났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집이라는 곳에 머물렀고 철도는 최대한 빠르게 사람과 짐을 수송했다고 한다. 근데 꼭 빠르게 달려야만 했을까?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외출 채비를 마치자마자 차량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침대칸 창문이 열렸고 츄츄와 나란히 누운 엄마가 계속 잔소리를 하기에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산책을 나섰던 아빠가 나물류를 한가득 안고 기차에 오르며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었다. 우리 집은 오늘도 느릿느릿 이동하고 있다.
나는 외출 채비를 마치자마자 차량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침대칸 창문이 열렸고 츄츄와 나란히 누운 엄마가 계속 잔소리를 하기에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산책을 나섰던 아빠가 나물류를 한가득 안고 기차에 오르며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었다. 우리 집은 오늘도 느릿느릿 이동하고 있다.
오랜만에 그 애를 만나 항구 근처를 산책하기로 했다. 그 애는 반대편 레일, 하행선을 지나는 중이었다. 우리는 이동 속도를 계산해 두 차량이 딱 스치는 지점, 바로 묵호역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친구네 집은 부산을 찍고 다시 환동해선을 거쳐 시베리아 횡단 레일로 접어들 예정이고 우리 집은 서울, 평양, 단둥을 거쳐 중국 CRH 선로 위로 올라갈 예정이다. 다음번에 만나려면 두 집이 부산역으로 들어설 타이밍이 딱 맞는 13년 후다. 그 애를 만나기도 전에 헤어질 순간의 아쉬움이 덮쳐왔다. 그러자 엄마 말이 이해가 갔다. 기차가 빠르게 달려야 할 이유.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야 할 순간.
한때 사람들은 머물렀다. 안정을 추구했고 머문 자리를 더 편하게 만들기 위해 많은 것을 쌓아 올렸다. 집값이 점점 더 높아지길 원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집이 무너져도 침묵했다. 무너지는 곳에 기꺼이 머물렀다. 그 시대의 미덕은 흔들리지 않고, 유동하지 않고, 오직 머무는 일이었다. 지반이 어떻게 되든, 지구 온도가 몇 도로 올라가든, 안락하고 평안하게 내부를 가꾸는 일이 모두의 최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구상의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집도, 지반도, 기업도, 국가도, 인간의 몸도…. 움직이지 않는 동물들은 피부가 늘어졌고 뼈가 무너졌고 몸이 주저앉았다. 부모님 세대 사람들은 모두 고착 증후군을 겪었다. 지구의 자전축이 0.1도 기울었기 때문이라는 불확실한 진단만 내려졌다.
고착 증후군이 유행한 직후, 엄마 아빠는 고양이 츄츄를 가방에 넣고 걷기 시작했단다. 사람들도 고정된 자리를 버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쉬거나 잠들면 몸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때 사람들이 찾아낸 게 기차, 바로 침대차였다.
이동해야만 비로소 살아남게 된 인간들은 철로 위에 집을 지었다. 레일 역시 고정된 자리였지만 달리는 차량 때문에 언제나 흔들리고 있었다. 움직이는 존재를 이고 있는 덕에 선로만은 무너지지 않았다. 차량은 새로운 집이 됐다. 평생을 일군 자리를 버려야 하는 사람들이 엉엉 울었기 때문에 엄마 아빠는 크게 웃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차량은 모두 침대차로 개조되었고 이동 속도는 0.2km로 설정되었다. 기차는 처음 설계와는 완전히 다른 수단, 정반대의 존재가 되었다. 기차는 속도를 버리고 삶이 됐다. 잠든 순간까지 움직임을 이어갈 수 없는 사람들은 기차의 느린 움직임에 삶을 맡겼다. 정중동, 머무는 일을 멈추고 나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사람들이 떠난 곳에서 로봇만이 같은 장소에서 반복적인 일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바삐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고정되지 않는 존재가 됐다. 비로소. 느리게 덜컹거리는 움직임 속에서 몸을 동그랗게 만 츄츄가 낮잠을 즐겼다.
기차에서 태어난 나는 햇살 좋은 날엔 기차와 나란히 함께 걷는 걸 좋아했다. 전력 질주를 하면 기차보다 먼저 달려 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려면 갔던 길을 돌아서 오든가 멈춰서서 집이 다가오길 기다려야 했다.
그 애와 수다를 떨다 보니 하루가 금방 저물었다. 돌아오는 길, 철로를 따라 걸으며 생각했다. 13년은 못 기다리겠다. 당장 그 애를 만나러 가고 싶었다. 고속 열차를 타기로 마음먹었다. 운행 숫자는 줄었지만 고속 열차는 달렸다. 최근 운행시각표가 개편됐다. 모두가 잠시 멈춰 서서 고속 열차가 통과하는 길을 만들었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양보했다.
"갔다 올게!"
걸음보다 느린 열차에서 사뿐히 내려 엄마 아빠와 츄츄에게 손을 흔들었다. 고속 열차를 네 번 정도 갈아타면 일주일 후엔 그 앨 볼 수 있을 거였다. 이럴 때만이라도 조금 더 빨랐으면 했다. 당장 그 애가 보고 싶으니까. 여행을 끝내면 집으로 돌아올 거였다. 돌아올 곳은 여기, 이곳이 아닐 거였다.
걸음보다 느린 열차에서 사뿐히 내려 엄마 아빠와 츄츄에게 손을 흔들었다. 고속 열차를 네 번 정도 갈아타면 일주일 후엔 그 앨 볼 수 있을 거였다. 이럴 때만이라도 조금 더 빨랐으면 했다. 당장 그 애가 보고 싶으니까. 여행을 끝내면 집으로 돌아올 거였다. 돌아올 곳은 여기, 이곳이 아닐 거였다.
황모과 작가
한국과학소설작연대 회원. 〈모멘트 아케이드〉로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밤의 얼굴들》, 중편소설 《클락워크 도깨비》, 장편소설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를 출간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을 소재로 한 SF 단편 〈연고, 늦게라도 만납시다〉로 제8회 SF 어워드 중단편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