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삶을 바꿔 온 ‘이동’의 역사
인류는 이동 수단의 혁신이 일어날 때마다 커다란 변혁의 시대를 맞이했다. 말과 마차에서 자동차로, 증기기관차로, 그리고 비행기로 이동 수단은 끊임없이 발전해 왔다. 이동 수단의 혁신은 사회, 경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측면에서 영향을 미쳤다. 세계 최초의 상업적으로 성공한 증기 동력 자동차는 1832년 영국의 발명가 월터 행콕이 발명한 ‘행콕 옴니버스(Hancock Omnibus)’였다. 증기 동력 자동차는 약 25mph의 속도로 달렸다. 마차에 가까웠던 느린 자동차는 전기를 만나며 날개를 달았다. 1881년, 프랑스의 발명가 구스타프 트루베는 세계 최초의 전기차인 삼륜 자동차를 발명했고, 1894년 영국의 토머스 파커가 기술을 바탕으로 세계 최초의 양산형 4륜 전기차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1890년대 말, 영국에서는 전기로 구동하는 택시가 만들어져 보급되기 시작했다. 영국의 전기 기술자 월터 버시가 개발한 전기 택시는 총용량 170Ah의 납축전지로 8마력의 전기모터를 구동시켜 움직였다. 이 택시는 전기모터가 내는 독특한 구동음으로 인해 ‘벌새’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자동차가 새로운 이동 수단으로 등장했던 19세기 말, 영국에서는 당시 증기자동차가 출시되면서 마차 업자들의 항의가 계속되자 마차와 마부들의 일자리를 보호하기 위해 새로운 법을 제정했다. 이른바 ‘붉은 깃발법’이었다. 법안에 따르면 한 대의 자동차에는 반드시 운전사, 기관원, 기수 등 3명이 있어야 하며 자동차의 최고 속도는 6.4km/h, 시가지에서는 3.2km/h로 제한했다. 기수는 낮에는 붉은 깃발, 밤에는 붉은 전등을 들고 자동차의 55m 앞에서 차를 선도하도록 했다. 붉은 깃발을 앞세워 자동차가 마차보다 빨리 달릴 수 없게 한 것이다. 신기술이 기존 삶의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대착오적인 규제로 인해 영국은 가장 먼저 자동차 산업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미국에 뒤처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증기기관차,
철도의 시대를 열다
이동 수단은 ‘기차’의 등장으로 또 한 번 변혁을 맞는다. 17세기에서 18세기쯤 산업혁명 당시의 영국은 연료로 쓰던 목재가 고갈되자 석탄으로 눈을 돌렸고, 탄광을 개발하게 되었다. 1765년 제임스 와트는 연료 낭비가 심한 기존의 단점을 보완, 증기의 힘으로 피스톤이 회전운동을 하는 증기기관을 세상에 선보였다. ‘기차(汽車)’를 한자로 풀이하면 ‘물 끓는 김으로 움직이는 차’라는 뜻이다. 물을 끓여 발생하는 수증기를 이용해서 기차가 움직였기 때문이다. 한편 광산 등지에서 석탄을 실은 광차를 갱도 바깥으로 끌어내기 위해 협궤 레일이 사용되었고, 지상에서도 말이 석탄을 실은 화차를 끄는 ‘마차철도’가 부설됐다. 영국인들은 증기기관의 발전에 따라 이 광업용 마차철도를 증기기관 동력원으로 사용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1804년, 리처드 트레비딕이 펜-이-다렌이라는 이름의 증기기관차를 최초로 만든 것을 시초로, 증기기관차와 함께 근대 철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근대철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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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04
- 트레비식 고압 증기기관차
- 와트의 증기기관에 있던
응축기를 없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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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9
- 스티븐슨의 증기관차 로켓호
- 여러 개의 관이 있는 보일러로
증기생산을 효율적으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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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말~
- 발전된 증기기관차
- 증기기관차는 19세기말까지 발전을
거듭하다가 디젤기관차로 대체
그러나 진짜 철도의 역사는 1829년 영국 리버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리버풀 레인 힐에서는 리버풀-맨체스터 구간에 어떤 기관차를 달리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한 시합이 열렸다. 여기서 로버트 스티븐슨이 제작한 로켓호가 우승했고, 1803년 13톤의 화물을 싣고 시속 48km 운행한 것이 리버풀-맨체스터 상업용 철도의 시작이었다. 증기기관차의 발전으로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는 철도 붐이 일었고, 경제 활동과 일상생활에는 가속도가 붙었다. 사람과 물자의 이동 시간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로켓호가 장착된 기차는 우편 마차보다 두 배나 빨랐고, 요금은 마차의 3분의 2에 불과했다. 가장 빠른 말은 시속 18km로 달렸지만 기차는 최대 시속 50km까지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기차의 출현으로 여행은 한결 편리해졌고 여행객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맨체스터와 리버풀 노선은 증기기관차 개통 후 1년도 채 안 된 시점을 기준으로 약 50만 명이 이용했다.
아성을 떨치던 증기기관차도 19세기 말부터 새로운 기술에 밀리기 시작했다. 증기기관차의 단점을 보완한 디젤기관차가 등장한 것이었다. 증기기관을 작동하는 데는 여러 사람이 필요했지만 디젤기관은 한 사람만으로 작동이 가능했다. 또한 증기기관에 비해 훨씬 조용하고 시동과 중지도 훨씬 쉬웠다. 디젤기관차는 증기기관차를 역사의 뒤안길로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엄청나게 빨라지거나
개인화되는 모빌리티
점점 빨라진 기차의 속도는 국가 경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유럽 대륙에서는 철도가 발달하면서 이웃 지역으로 수출하는 상품이 늘어났다. 공장은 기계를 이용해 더 많은 양의 상품을 생산했다. 경제의 규모는 전체적으로 커졌다.
고속철도의 역사는 일본에서 1964년 신칸센이 개통되며 시작됐으며, 유럽에서는 프랑스와 독일에서 먼저 개통됐다. 고속철도가 개통되면서 철도는 또 한 번 부흥기를 맞이했다. 도카이도 신칸센은 첫 운행을 시작한 1975년 5월 하루 만에 100만 명을 수송했다. 1917년 일본철도원에서 발행한 자료를 보면 이동의 속도에 불을 붙인 철도는 농업과 임산물 그리고 광산업, 공업, 상업, 문화와 국제관계 등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와 독일의 예를 보면 철도가 개통 후 철도 수송량이 증가하다가 1920~1930년대 자동차의 증가로 급속하게 감소했다. 그러나 1980년 이후 프랑스의 고속철도와 1990년 독일의 고속철도가 개통하면서 철도 수송량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증가했다. 세계 일주 여행이 활성화되고, 문화 전파가 수월해진 점 등은 철도로 인해 빨라진 이동 속도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제4차 산업혁명 시대, 이제는 ‘초고속열차’ 시대가 열린다. 지난해 11월 아랍에미리트(UAE)는 두바이와 약 150km 떨어져 있는 아부다비를 잇는 하이퍼루프 건설을 승인했다. 일론 머스크(Elon Musk) 테슬라 CEO의 아이디어로 제안된 하이퍼루프는 두바이에서 아부다비까지 2시간 넘게 걸리던 시간을 12분으로 단축할 수 있다. 우리는 머지않아 몇 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시속 1200km로 몇 분만에 주파하는 초고속열차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동력과 주행거리를 획기적으로 개선한 퍼스널 모빌리티의 출현도 머지않았다. 새로운 이동 수단이 생기면 인간의 삶도, 도시의 기능도 달라진다. 언제나 두려움 반, 기대 반이었던 신문물의 등장은 앞으로 사회와 경제, 나아가 우리 일상의 패러다임을 어떻게 바꿔놓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