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의 폐해에 대해서는 늘 찬반이 엇갈리지만 이재 김후신(彛齋 金厚臣, 1735~1781 이후)이 활동한 영·정조 연간에는 두 임금의 국정 운영도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영조는 곡식 소비의 과다함과 술의 폐단을 들어 수차례 금주령을 내리고 이를 어긴 자는 목을 베기까지 하였다. 이와 반대로 정조는 금주령은 백성들만 힘들게 할 뿐 제대로 지킬 수 없는 율법으로 여겼다. 신하들의 금주령에 대한 상소가 있어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누구보다 술을 사랑하였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크게 술에 취한 선비가 세상을 다 가진 양 파안대소를 하며 다른 선비들에게 떠밀려 가는 현장을 포착한 그림이 이재의 대표작 <통음대쾌도(痛飮大快圖)>이다. 기막힌 해학과 익살이 담긴 이 그림을 중심으로 그의 삶과 예술세계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어진(御眞)을 두 번이나 그린 화인
이재의 출생과 생애에 대한 자료로서 변변한 것은 없다. 다만 그의 부친 불염재 김희겸(不染齋 金喜謙, 1710~1763경)이 겸재 정선의 제자로 도화서화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과 특히 산수인물화에 빼어난 솜씨를 보이는 그의 작품 몇 점이 오늘까지 전해질 따름이다. 부친의 재주를 물려받았음인지 이재 역시 주로 도화서화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전해지며 29세 무렵 종6품직인 인의(引儀)로 관직을 수행한 기록이 있다. 이는 국가의 의례를 관장하던 예조의 통례원(通禮院)에 속한 관원으로서 각종 의례행사에서 식순을 적은 홀기에 따라 구령을 외치는 등의 의전업무가 주였다.
이재 김후신은 도화서화원의 가장 큰 영예로 여겨지는 어진 제작에 두 번이나 참여했다. 첫 번째가 39세(1773년) 때로 80세에 이른 영조의 어진 제작에 변상벽, 신한평 등과 참여했으며 이에 대한 공으로 지방 수령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 다음은 정조 등극 후인 47세(1781년) 때로 젊은 군왕(30세)의 어진 제작에 한종유, 김홍도 등과 참여했으며 이때의 공으로 안의(安義, 지금의 경남 함양) 첨사로 나가는 영예를 누렸다.
천지에 웃음을 쏟아내는 통음의 주객을 그리다
꽤나 너른 들판에 선비 세 사람이 술 취한 한 젊은이를 떠밀고 있는 황망한 모습이다. 마치 누구의 눈에라도 띄면 큰일이 일어날 모양새다. 얼핏 보면 세 사람으로 보이지만 발 모양을 세어 보면 네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차림새는 갓에다 중치막의 도포를 걸쳤으니 양반네임이 틀림없고 여기에다 술띠까지 둘렀으니 지체마저 만만치 않아 보인다. 수염도 거의 없는 한 젊은 양반이 무리의 중앙에서 떠밀리고 있다. 양반의 체통을 지켜주는 갓은 어디로 내버렸는지 알 수 없다. 초점을 잃은 눈망울과 해 벌린 입만 보아도 그는 벌써 억병으로 취했다. 도도한 취기 속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조차 없다. “으하하 으하하” 세상을 흔들어 놓을 듯한 호쾌한 웃음밖에 터뜨릴 것이 없다.
주변을 살피면서 젊은이의 오른팔을 잡아끄는 지긋한 나이의 양반은 난감한 표정이지만 그래도 자신의 체면은 덜 꾸긴 모습이다. 왼팔을 잡은 이와 얼굴을 파묻은 채 등 뒤에서 떠밀고 있는 사내는 그 팽팽한 다리 뻗음에다 펄럭이는 도포 자락을 볼라치면 주변에서 누가 볼세라 당황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들의 뒤편에는 수령이 제법 되어 보이는 몇 그루 나무가 서 있는데 인물들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나무 윗부분을 과감히 배제했다. 또한 나무 옹이들이 매우 커서 마치 사람들이 놀란 양 입을 쩍 벌리고 이들의 소동을 지켜보고 있는 듯하다. 수목 사이에는 작은 개울도 한 줄기 흐르고 있으며 푸른 잎들 사이의 일부에는 엷은 갈색이 잦아든 것으로 보아 계절은 늦여름 혹은 초가을이 아닌가 싶다.
조선시대의 풍속화가 대개 사람 위주로 그 모습만을 담아내는 데 비하여 <통음대쾌도>는 푸른 바탕의 은은한 담채로 그린 산수에다 그에 잘 어우러지는 인물들을 담아내고 있는데 여기서도 이재의 참신하고도 개성적인 회화 능력을 엿볼 수 있다. 아울러 각기 다른 독특한 인물을 단순한 터치를 통해 웃음기 가득한 표정을 짓게 만들며, 정교한 필치로 그려지는 비뚤어진 갓의 모습, 필선 몇 개를 단숨에 그어 나타내는 펄럭이는 도포자락 등을 포함하여 익살스럽고도 생기 넘치는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진경시대 풍속화의 진면목을 마주하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생애의 변변한 기록이 없는 바 이재의 죽음에 대한 기록인들 제대로 있을 리 없다. 단지 안의첨사로 나아간 47세(1781년) 이후 세상을 버린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석 잔 술로 대도에 통하고 한 말 술로 자연과 합일된다 했던 이백의 시구를 빌리지 않더라도, 이재 김후신 스스로 자신의 그림 속 주인공마냥 통음 속에 고통을 지우며 한세상 껄껄 웃고 살다 떠나지 않았을까 싶다.
이재 김후신의 <통음대쾌도(痛飮大快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