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 달 전 공단에 합류한 류환민 비상임이사. 맡은 역할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촘촘히 계획을 세우는 건 그의 오래된 루틴이다.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일로
만들기 위해서는 바꿔야 할 것과 바꾸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하는 그를 만나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writer. 임지영 photographer. 전석병

비상임이사직은
축적된 경험 살릴 좋은 기회

“비상임이사는 공단이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조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조언자 역할에 충실하고자 합니다.”
뒤늦게 새로운 시작을 하기로 마음먹은 데에는 ‘피그말리온 효과’에 대한 믿음 같은 것이 있었다. 긍정적인 기대나 관심이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효과 말이다. 류환민 이사는 자신의 공직 경험을 살려 공단 발전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상임이사를 지원했다. 특별한 이유나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잘해왔고, 잘하고 있고,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을 하면 그나 그가 속한 사회에 좋은 일이 있으리라는, 긍정적 기대와 관심이 그를 밀어 올린 것이었다.
취임 후 넉 달이 지났다. 사소한 것도 허투루 넘기는 법이 없는 그이기에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깨달은 몇 가지가 있다. 그중 경험과 통찰력으로 주목한 것 중 하나가 사업 구조의 한계와 그에 대한 개선 가능성이다.
“선로 사용료 수입에 크게 의존하는 공단의 사업 구조상 발전에 한계가 있을 것으로 느꼈습니다. 개선의 여지도 있을 것 같고요. 하지만 혼자만의 계획이나 구상대로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래도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보탬이 되고 싶어요. 앞으로 고민과 논의가 필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밀도 있게 일하는 직원들은 그에게 영감을 주었다. 비록 제한된 업무 공간이지만 그 밀도가 끊임없이 새로운 에너지를 생성하며 남다른 공기를 자아내기 때문이었다.
“이사장님을 비롯한 간부진과 직원들이 업무에 충실하게 임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저도 그 일원이 되어 자부심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요. 제 경험을 살려 각종 규정을 합리적으로 정비하고, 효율적인 예산편성에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고난과 위기,
새로운 힘과 기회가 되기도

류 이사에게는 아주 특별한 경력이 있다. 우리나라의 입법을 담당하는 헌법기관인 국회에서 근무했던 이력이다. 1988년 재무위원회 입법조사관을 시작으로 법제실 총괄과장, 예결위 입법심의관, 예결위 전문위원, 기획조정실장, 문방위 수석전문위원, 기재위 수석전문위원까지 다양한 보직을 거쳤다. 예산 편성과 제반 기획에 관한 업무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경험을 한 셈이다.
“1977년부터 1999년까지 영국 유학을 마치고 재무위원회에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IMF 사태 뒤처리를 위해 짧은 기간에 많은 금융관계법을 처리하느라 밤을 새우다시피 했지요. 그래도 돌이켜보면 인생에서 가장 희망적이었고 그랬기에 열정적인 시기였어요. 그때의 경험이 보람으로 남아 있습니다.”
일 더미 속에서도 자신만이 느낄 수 있었던 작은 행복들로 채운 시간이자 그동안 미처 보지 못했던 자신을 발견해 가던 여정이었다. 때론 돌부리에 차이고 가끔은 유빙처럼 떠다녔지만, 그 같은 여정이 있었기에 두 발로 딛고 선 자리를 더 단단히 다질 수 있었다. 여간해서 좌초하거나 표류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그이지만, 고비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 법. 그에게도 한계를 시험하는 힘든 순간은 있었다.
“예결위 기획조정실장으로 근무할 때, 모시던 총장님과 의장님께서 정치인들이라 공무원 마인드와 사뭇 달랐습니다. 대화도, 설득도 어려웠지요. 길은 외길이고, 어떻게 해서든 난관을 헤쳐 나갈 방법을 모색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민 끝에 그는 원칙을 중시하기로 결심했다. 공무는 공무원답게 처리하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원칙을 고수하며 업무를 처리했고, 결과는 정직하게 돌아왔다.
“다행히 그분들께서 제 진정성을 이해하고 신뢰해 주셨어요. 이후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젊을 때일수록 남들이 힘들다고 하는 업무를
많이 경험해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가장 많이 배우고 깨닫고 생각하게 됩니다.
경험만 한 기반과 자산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모든 게 달라져도
초심만큼은 늘 한결같기를

<잔혹한 인턴>의 주인공 고해라는 그토록 바라던 취업에 성공하지만 주어진 임무에 대한 심리적 부담이 커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 한다. 현실 속 직장인도 비슷하다. 연차가 쌓이고 직급이 올라갈수록 심리적 부담이 커진다. 체력과 열정은 고갈되어 가는데, 요구하는 일은 점점 중요해지고 많아지는 느낌이다. 개개인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많은 이들이 엇비슷한 고민을 하지 않을까. 류 이사는 무거운 의무감 대신 ‘즐거운 마음’을 장착할 것을 조언한다. 그가 말하는 즐거운 마음이란 내가 회사의 주인이라는 주인의식이다.
“제가 직장생활을 한 시기와 비교하면 지금은 사회 분위기와 생활 환경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저와 조금은 결이 다른 세상을 사는 후배들에게 무슨 조언을 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만, 조직의 일원인 이상 적어도 조직에 누가 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보다 우리를 먼저 생각한다면 좋겠습니다. 스스로 객체가 아닌 주체로 바라본다면 직장이라는 일상 속 공간이 조금은 더 즐거운 일터가 될 겁니다.”
땀과 도전 없이 보낸 시간은 언제나 아쉽다. 인생 선배들이 대부분 ‘젊을 때 좀 더 치열하게 살 걸’ 후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젊을 때일수록 남들이 힘들다고 하는 업무를 많이 경험해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가장 많이 배우고 깨닫고 생각하게 됩니다. 경험만 한 기반과 자산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적응하기 위해 다 바꾸더라도 초심만큼은 절대 잃지 말고 더욱 견고하게 다지라는 말.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며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후배들에게 그가 보내는 따뜻한 응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