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인 조광진의 부벽루(浮碧樓) 편액

아름답기로 이름난 평양성 대동강변 청류벽 위에는 ‘부벽루’란 누대(樓臺)가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 누대는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조선시대 3대 누대로 손꼽는다. 누대에 오르면 청류벽 아래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며 강 건너 먼 평야에는 올망졸망 작은 산봉우리들이 점점이 펼쳐져 있어 그 정경이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이렇게 풍광이 빼어난 누대에는 조선 후기의 명필로 이름난 눌인 조광진(訥人 曺匡振, 1772-1840)이 쓴 편액이 웅장한 자태로 대동강의 비단 같은 물결을 굽어보고 있다. 좋은 풍경과 아름다운 누대, 천하의 명필이 함께 어우러졌으니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이 부벽루의 편액 글씨를 통하여 눌인의 생애와 그의 예술세계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추사가 그리워하던 눌인과 그의 글씨

태어날 때부터 말을 더듬어 어눌하다는 뜻의 눌인(訥人)이란 아호를 썼던 그의 본관은 용담(龍潭)이다. 근대의 유재건이 저술한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을 보면, 눌인은 ‘집이 가난하여 사방을 떠돌며 배웠는데 초년에는 원교 이광사(1705-1777)의 글씨를 익혔고 만년에는 크게 깨달아 깊이 안진경 필법의 정수를 체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눌인이 태어날 무렵에는 원교가 신지도 유배생활을 하다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으니 눌인이 글씨를 직접배웠다기보다는 원교의 글씨를 구하여 배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눌인은 주로 평양을 중심으로 활동한 서예가였다. 19세기 개성의 문인 한재락(韓在洛)이 쓴 [녹파잡기(綠波雜記)]에는 ‘눌인이 쓴 대련이나 편액이 평양의 기방, 술집의 기둥이나 처마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정도로 흔했다. 평양에서는 높이 평가되지 못하다가 한양에서 사대부들 사이에서 높은 칭송을 얻자 평양에서도 높게 평가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한양 사대부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당시 예술계의 거장으로 잘 알려진 추사 김정희와 자하 신위이다.
이를 증명하듯 추사의 [완당전집(阮堂全集)]에는 눌인에게 보내는 서신이 8편이나 실려 있다. 내용의 대부분이 눌인의 글씨에 대한 좋은 평이나 평양 주변 비석 등의 임서를 부탁하거나 눌인을 그리워하며 한양에 한 번 다녀가기를 바라는 것들이다. 추사의 서신 하나를 살펴보자.

‘요즈음 녹음이 날로 거칠어져 가는데,
동정(動靖)이 더욱 안중(安重)하신지요.
구구한 마음 멀리 쏠리외다...
산수정(山水亭)이나 연광정(練光亭)의
편액은 기굴(崎崛)하지 않은 바 아니나
전번에 쓴 것과 비교하면 반드시 낫다고는
못하겠으며 전번 쓴 진본(眞本)이 나의 상자
속에 들어 있는데, 이야말로 천연 그대로
손에서 나온 것이니 비록 다시 이와 같이
쓴다 해도 절대로 이를 뛰어넘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타인의 글씨에 대해 인색하다 할 만큼 호평을 아끼던 추사가 눌인의 글씨에 대해서는 이렇듯 좋아했으며 또 그를 ‘압록강 이동에 일찍이 이만한 명필이 없었다.’고 상찬을 아끼지 않았다.

웅건하면서도 개성적인 눌인 글씨의 진수

고려시대의 유명 시인 김황원(金黃元)은 부벽루에서 바라본 풍광이 아름다워 ‘긴 성벽 기슭으로 강물이 도도히 흐르고, 넓은 벌 동녘에는 점점이 산이있네(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라고 시의 앞머리를 잡았지만 이 글귀 뒤로 더 이상의 시구가 떠오르지 않자 통곡하며 붓대를 꺾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구려시대 영명루란 이름으로 지어졌던 부벽루는 임진왜란에 불탄 것을 광해 때 중건(1614년)한 누대이다. 정면 5간, 측면 3간의 큰 규모이며 겹처마와 팔작지붕을 올린, 아름답기 그지없는 누대로서 그 규모에 어울리는 편액을 걸었으니 글자 하나하나가 쌀가마니만큼 크다. 편액은 단지 ‘부벽루’ 란 세 글자에 불과하지만 이런 큰 글씨를 쓸 만한 이로는 단연 이 방면에 오랜 경륜을 쌓은 눌인이 적격자로 선정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눌인이 큰 붓을 휘두를 때는 ‘절굿공이만 한 붓대에 큰 새끼를 동여매어 이를 어깨에 걸어 메고는 쟁기를 갈듯 큰 걸음으로 걸어 다니며 썼다.’는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의 이야기가 실감나듯 눌인의 일필휘지하는 붓놀림이 눈에 선하게 다가온다.
서체 또한 이곳의 오랜 역사에 잘 어울리도록 팔분(八分) 예서의 기교를 뺀 고예(古隸)를 택했고 행필하는 가운데에는 중간중간 절(折)을 주어 요철에 의한 굳센 획을 구사하고 있다. 여기에다 치밀한 결구를 더함으로써 ‘쇠를 구부리고 철을 녹이는 듯’ 금석기의 힘찬 울림이 우렁차게 퍼져나가는 듯하다. 이는 바로 고구려 때 장수왕이 부친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주 집안(集安)에 높이 약 6.4m에 달하는 거대한 자연석에 새긴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의 웅혼한 서체의 맛을 눌인이 힘차게 재현해 낸 것이 아니겠는가.

전서와 예서를 잘 썼으며 지두서(指頭書)와 옛 글씨를 임모하는 데에 더욱 특장을 가졌던 눌인은 평양에서만 활동하며 고단한 삶을 오직 글씨 쓰는 낙으로 살다가 생을 마쳤다. 눌인 조광진. 그의 주옥같은 작품들 대부분이 북녘에 남아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수많은 문화재가 남북분단으로 인해 참관의 기회마저 앗긴 현실이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빠른 시일 내에 봄날 춘설이 녹듯 이런 아픔이 해소되길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