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철도문학상
최우수상 수상작
간이역에서
볕살이 보시시 내려앉은 간이역에
땀방울 송송 휘감기는 끈덕진 삶의 고단함이
훈장처럼 수북하게 쟁여있고
소금 꽃이 뽀얗게 피인 아버지가 보입니다
눈부신 젊음을 송두리째 철도에 아낌없이 바치고
잔뼈가 굳어있는 빛바랜 시간들이
넌지시 바람에 쓸려갑니다
아지랑이 사이로 어슴푸레 비치는 검은 그림자
땀직땀직 이름을 들추지 않는 침묵 끝으로
당신의 굽은 뒷등이 짠하게 밟힙니다
어디선가 꽃물이 든 들꽃 씨방이 톡톡 터지고
늘 착하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발이 되어준 철길을 보듬고
오랜 기다림에 익숙해진 열차처럼 겸허히 사신 아버지
조심스럽게 몸을 맡긴 연장을 드높이 들고
철길이 어긋나지 않게
흔들림 없이 철도를 꼬장꼬장 내려치십니다
죽어서나 반나절 펑펑 울어 누울 자리에
촘촘하게 한소쿠리 꿈을 쓸어 담고
한사람의 생애가 호젓하게 깊어가는 밤에도
당신의 그림자를 덥석 물고 계십니다
더없이 그립고 아쉬운 것들이
하나둘씩 소실점 넘어 아득히 사위어가고
오늘도 하루의 안녕을 기도하는
그 손끝에 닿는 아픔이 더디게만 흘러갑니다
젊은 시절도, 초임 시절도
묵묵히 번드러운 숨결을 불어넣고
침목이 미덥게 놓인 철길은
철도노동자 아버지의 크나큰 보람이었습니다
천천히 들어서는 막차의 기적소리 어둠에 묻히고
저는 잠시 종점으로 가는 간이역에 서서
미처 가라앉지 못한 기억들을 퍼뜩 떠 올립니다
아버지의 젊음과, 사랑과, 눈물과, 아픔이 묻어나고
하나같이 처음이어도, 끝이어도
인생이 마치 두 갈래 철길과 같다던 아버지
올곧게 놓인 철길을 자박자박 밟으며
이젠 내가 침목을 단단하게 고이는 한 개의 자갈이 되어
쉰내가 풀풀 나는 마음 한 자락을 툭툭 털어드리고
아버지의 철길을 오래도록 지켜주고 싶습니다
On
제9회 철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오후의 기찻길에서
봄 햇살이 손가락으로
창문을 톡톡 두드리는 정오
달리는 기차 안은 풀빛으로 환한데
날개를 폈다 접었다 나비는
허공에 편지를 쓰고 있다
누굴 따라 들어왔을까?
옷깃에 앉은 나비와 동행하는 기차 여행
옆에서 긴 세월을 짰다가 풀었다가
바늘코를 만지던 엄마는 졸고 있다
주름살이 강물처럼 흐르는 얼굴에
햇살이 살며시 손을 담그고 있는데
숲을 해치며 기차는 달려 나가고
그리움을 색채로 나타낸다면
돌아가신 아버지의 마음은 어떤 색일까
엄마는 등 뒤에서 평생 아버지를 바라보며
지나온 나날을 촘촘히 수놓았겠지
구부정한 어깨가 나비의 날갯죽지처럼 가냘파서
만지면 곧 바스라질 것 같아
창가에 앉아 풍경들을 잠시 배웅하는데
슬픔도 시간이 지나면 편안해지는 걸까
오래 입던 옷처럼 좌석에 걸쳐놓은 오후
하늘에 물수제비를 던지면서
먼저 간 아버지의 나라를 상상한다
씁쓸한 봄나물을 둘러 앉아 나눠 먹었던
그해 밥상을 기억하는 마음
아버지의 영혼은 가까이 있는 슬픔이 되어
그렇게 몇 해를 더 보내다가
익어가는 봄빛 사이로 사라졌다
머리가 안개꽃처럼 하얗게 센 엄마는
지나간 추억을 들숨 날숨으로 짜고 있는데
기차는 깊고 환한 호숫가를 달리며
봄이 수놓은 풍경 속으로 서서히 스며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