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인 정학교의
태호산석도(太湖山石圖)

19세기의 조선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나라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시기였다. 이런 극도의 혼란 속에서도 시의에 따라 청(淸)의 문화를 적극 수용해 개성적인 예술세계로 발전시킨 대표적 화인 중 하나로 괴석도에 전념한 몽인 정학교(夢人 丁學敎, 1832~1914)가 있다. 괴석도, 즉 돌을 소재로 한 그림은 12세기 송나라 휘종 때 편찬된 [선화화보(宣和畵譜)]에 이미 화목으로 실릴 정도로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왔다. 여기서는 괴석도로서 현대 추상화를 방불케 하는 몽인 정학교의 [태호산석도(太湖山石圖)]를 통해 그의 삶과예술세계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writer. 최견 서예가, 한국서화교육원장

당대의 명필이 괴석도에 천착

몽인은 어린 시절 부친으로부터 학문과 글씨를 배웠으며 당사대가(唐四大家)의 글씨를 익혔다. 글씨에 남다른 재주를 가져 주변으로부터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어린 시절을 문경에서 보낸 몽인은 27세(1858년) 때 생원시에 급제한 것을 계기로 한양 외곽의 여항인 마을로 옮겼다. 이 무렵 친교를 맺은 이들이 오경석, 김석준 등의 역관들과 전기, 이한철, 유재소, 장승업 등의 화인들이며, 이들이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장승업의 그림에는 몽인의 대필(代筆)이 하도 많아 몽인의 글씨가 있는 그림이면 장승업의 진품으로 본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까지 전한다. 몽인이 처음 관직에 나아간 것은 급제 후 6년이 지난 33세 때 훈련원 부사용(訓練院 副詞勇, 종9품)이란 말단직을 받는 것이었다. 이후 채 한 달이 되지 않아 왕실족보(간략본)를 보완하는 [선원보약(璿源譜略)] 개편작업에 감독직인 별간역(別看役)을 맡았다. 이 공적으로 이듬해 종6품직에 승진하였다. 당대에 명필로 이름을 떨치던 몽인이 화계사 대웅전 중수(1870년) 때 편액을 쓴 것은 그의 나이 불과 39세 시절이었다. 몽인이 괴석도에 전념한 것은 40대부터였으며 55세 때 최초의 사립학교로 설립(1886년)된 배재학당의 편액을 썼다. 64세(1895년)에 강화판관과 종5품인 대구판관에 임용되었으나 건강상의 문제로 곧 물러났다. 이후 주위의 서화인들과 어울리며 그림과 글씨에만 전념하다 당시로는 아주 장수한 83세에 숨을 거두었다.

현대의 비구상 작품과 비견되는 괴석도

날카롭게 하늘로 치솟은 바위 형체가 자못 삼엄하다. 괴석 전체가 한 덩어리인지라 강인한 기상이 사방에 퍼진다. 마치 나뭇가지인 양 위로 오르며 서너 갈래로 벌어져서 단조로움을 슬쩍 피했다. 앙상한 뼈 모양으로 군살이 전혀 없고 수척하기까지 해 스산한 느낌마저 준다. 태호석을 근간으로 한 괴석임에도 하단 좌우와 중간, 상단에 가시나무인 듯한 나목을 조화롭게 배치해 마치 깊은 협곡에 든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금세라도 구름과 우뢰가 몰아칠 듯한 긴박감을 자아내며 태고의 자연 속에 침잠되는 듯한 몽환적 신비감을 주기도 한다. 옛 문사(文士)들이 천지조화의 공력이 깃든 괴석을 가까이 두고 오악(五嶽)의 명산을 보듯 즐겼다는 말이 허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화폭 좌측의 화제는 당나라 유상의 시를 빌려왔다.

천년 묵은 푸른 이끼 그림으로 전해지지만
굳고 곧은 한 조각 모습만 온전하네
어찌 알리요 갑자기 쓰일 일을 만나더라도
작은 바위로 하늘을 떠받칠 수 없음을
蒼蘚千年粉繪傳 堅貞一片色猶全
那知忽過非常用 不把分銖補上天

괴석이 오랜 세월 전해져도 돌의 모습만 온전하며 이 돌은 다른 데는 크게 쓸모가 없다는 말이다. 그림과 글씨가 썩 잘 어울리는 서화동격(書畵同格)의 작품으로 괴석과 나목, 적절한 여백과 유인(遊印), 세련된 필치와 능숙한 설채까지 모두가 흠잡을 수 없는 수작이다. 조선 말기에 왜 몽인이 ‘정괴석’으로 불렸는지를 충분히 알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