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류지현은 수년간 ‘냉장고로부터 음식을 구하자’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그 과정에서 발견한 지식 중 물건의 형태로 소개할 수 있는 지식은 그의 손에서 디자인 작품이 되고,
이야기로 풀 수 있는 지식은 그의 책 <사람의 부엌>과 <제로웨이스트 키친>을 통해 소개됐다.
그가 제안하는 건강한 부엌이란 무엇일까?

writer. 전하영 sources. 류지현

냉장고의 모순에서 벗어나고자

이탈리아와 네덜란드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디자이너 류지현은 ‘낭비 없는 부엌’을 만들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연구하고, 실천하고, 전파해 오고 있다. 그가 처음 식재료의 보관법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 함께 살던 유학 시절. 여러 사람이 냉장고에 넣어 두고 잊어버린 식재료가 종종 그대로 버려지는 상황을 보며 이는 분명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장고와 유통기한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던 시절에는 어떻게 음식을 보관했는지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냉장고처럼 온도가 낮은 환경에서 오히려 상태가 안 좋아지는 식재료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전기를 써가며 식재료의 맛과 영양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죠. 냉장고에 넣어두고 썩혀 버리는 음식물도 많고요. 이런 모순적인 상황들을 해결하는 데 디자이너로서, 작가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시도해 보게 됐습니다.”
그가 참여한 ‘냉장고로부터 음식을 구하자(save food from the fridge)’ 프로젝트는 식재료를 전통적인 음식 보관법이나 농부들의 노하우를 이용해 상온에서 보관하며 스스로 관리해 먹는 식생활을 제안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연구 과정에서 발견한 지식 중 물건의 형태로 소개할 수 있는 것들은 보관 도구로 디자인한다. 그의 석사 졸업작품 ‘지식의 선반’ 역시 프로젝트를 디자인으로 구현한 것이었다. 반면 도구보다 말과 글로 소개하는 것이 적절한 지식은 책과 인스타그램(@savefoodfromthefridge)등을 통해 공유하고 있다.
“‘냉장고로부터 음식을 구하자’ 프로젝트는 냉장고가 없는 삶이 아니라 냉장고를 현명하게 쓰는 부엌 생활을 제안합니다. 바나나, 사과, 귤이나 가지, 호박 등 냉장고에 넣을 필요가 없는 식재료들은 냉장고 밖에 보관합니다. 눈에 잘 띄니 잊어버릴 일도 없고, 관리할 수 있을 만큼만 장을 보게 되죠. 냉장고에 의존하지 않고 내가 부엌의 주인이 되는 삶은 나와 가족의 건강, 나아가 지구의 건강을 지킵니다. 더 넓게는, 그런 변화가 식재료의 유통 시스템을 바꿀 수도 있고, 기아 문제 개선에 도움을 줄 수도 있고, 나아가 인간이 환경에 끼치는 영향을 줄일 수도 있습니다.”

‘냉장고로부터 음식을 구하자’ 프로젝트는
냉장고가 없는 삶이 아니라 냉장고를 현명하게 쓰는
부엌 생활을 제안합니다. 냉장고에 의존하지 않고
내가 부엌의 주인이 되는 삶은 나와 가족의 건강,
나아가 지구의 건강을 지킵니다.

식재료를 저장하는 오래된 지혜들

그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3년여 동안 세계 곳곳을 다니며 음식을 저장하는 다양한 지혜들을 직접 찾아보기도 했다. 그때 만난 대표적인 저장 방법을 몇 가지 소개한다. 사과는 에틸렌 가스를 방출해 다른 채소나 과일을 빨리 익게 하지만, 감자와는 반대로 작용해 성장을 지연시킨다. 또한 감자는 어두운 곳에서 더 오래 보존되므로 빛이 들지 않는 곳에 사과와 함께 보관해야 한다. 가지, 애호박, 오이 등은 채소라고 알고 있지만 생물학적으로 과일로 분류된다. 즉, 낮은 온도에 약하고 습도를 필요로 해 냉장고에 보관하기 적합하지 않다. 이런 채소들은 실온에서 물을 담은 그릇 위에 구멍 난 그릇을 올린 후 그 위에 채소를 얹어 보관하면 물이 증발하면서 채소가 수분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류지현 작가는 그때의 기록을 첫 책 <사람의 부엌>에 담았다.
“<사람의 부엌>과 <제로웨이스트 키친>은 모두 ‘냉장고로부터 음식을 구하자’ 프로젝트의 기록입니다. <사람의 부엌>에서는 프로젝트의 철학과 함께 자연의 호흡으로 살아가는 여러 사람의 부엌을 소개했어요. 유럽과 남미 등 냉장고에 의존하지 않는 부엌을 찾아 떠난 여행을 담았습니다. <제로웨이스트 키친>은 연구 과정에서 배운 구체적인 지식과 경험을 저희 부엌에서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이 각자의 부엌에서 새로운 식생활을 직접 실천해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냉장고에 의존하지 않는 부엌을 위해

류지현 작가는 냉장고에 의존하지 않는, 건강한 부엌을 만드는 첫걸음은 나의 식생활에 관심을 갖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내가 얼마나 자주 장을 보고, 장 본 것을 얼마 동안 소비하는지, 버리는 식재료는 없는지 스스로 소비 습관을 살펴보는 것이다.
“기술에 맹목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이용한다면 어느 정도의 편리함을 유지하면서도 나와 지구 모두에게 건강한 부엌을 꾸릴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식재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지만 반복적인 실천이 필요해요. 새로운 식생활을 꾸려 나가기 위해 연습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는 프로젝트를 진행할수록 채소나 과일이 가진 생명력에 놀라곤 한다. 먹거리도 하나의 생명임을 인식할수록 덜 버리게 되고, 더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식생활 실천을 전파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는 많은 이들이 이러한 변화와 실천에 동참하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 수도 있으리라 믿는다.
“익숙한 습관을 깨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일단 하나의 식재료로 시작해 보세요. 그 하나의 실천이 이어져 또 다른 습관을 만들어 줍니다. 습관은 또 하나의 삶의 방식, 나아가 삶의 철학이 됩니다. 많은 사람의 똑같은 습관은 그 문화의 전통이 될 수도 있죠. 냉장고가 20세기의 전통으로 자리 잡은 것처럼 21세기에는 버리지 않는 부엌이 새로운 전통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입니다.”

<사람의 부엌>

<제로웨이스트 키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