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끝에 피어난
충절의 기상
매죽헌 성삼문의
간찰(簡札)
조선이 건국된 14세기 말부터 시작된 왕권쟁탈전은 1, 2차 왕자의 난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 끝에 태종(이방원)이 제3대 왕으로 즉위하면서 일단락되었다. 뒤이어 왕좌에 오른 세종은 많은 덕치를 통해 국가의 법도와 질서를 바로 세울 수 있었으나 세종 사후, 병약한 맏아들인 문종이 즉위하여 겨우 2년 3개월 만에 세상을 버리자 또다시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문종의 후사를 이어받은 단종은 열두 살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올랐지만 부모 형제가 없는 혈혈단신의 고적한 신세였다. 선왕의 유지를 받들고자 김종서, 황보인 등의 원로대신들이 어린 왕을 보좌하고자 진력을 다했지만,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으로 또다시 궁궐 뜰은 선혈이 낭자했다. 이렇게 수양이 왕위에 오르자 이를 반대하던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등은 선왕의 뜻을 받들기 위해 단종 복위운동을 꾀하다가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었다.
여기서는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서 학자이자 예술가인 매죽헌 성삼문(梅竹軒 成三問, 1418~1456)의 간찰(簡札)을 통하여 그의 삶과 예술세계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한글 창제에도 크게 기여
매죽헌은 21세 때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급제해 성균관주부(成均館主簿)로 처음 출사하였으며 이어서 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이 되었다.
1446년(세종 28)에 이루어진 훈민정음(訓民正音) 반포 시에는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당시 요동에 귀양 와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에게 13차례나 찾아가서 정확한 음운(音韻)을 이해하고 배워왔으며 명나라에 가서는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직접 연구하기도 하였다. 이때가 매죽헌의 나이 29세 무렵이었다.
이듬해에는 세종의 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우리의 한자음을 바로잡아 통일된 표준음을 내고자 하는 [동국정운(東國正韻)]을 편찬하여 다음 해에 간행하였다. 이는 중국의 [홍무정운(洪武正韻)]에 대비되는 운서였다.
매죽헌 33세 때(1450년) 명의 사신 예겸(倪謙)이 우리나라에 왔다. 사신을 접대하는 연회에서 서로 시문을 주고받는 자리가 펼쳐지자 매죽헌과 신숙주, 정인지 등이 함께 이에 응하였으며 사신은 이들의 화답시를 보곤 극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조선 전기 성현이 저술한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예겸이 두 선비(성삼문, 신숙주)를 좋아해 형제의 의를 맺었으며 귀국할 때는 눈물을 흘렸다”는 기사가 전한다.
세조가 즉위한 첫해(1456년)에 명의 사신이 온다는 통보가 오자 매죽헌의 부자와 집현전 학사들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를 위한 거사가 논의되었다. 세조를 제거하기 위한 거사는 6월 초하루 창덕궁의 사신 초대연의 자리에서 실행하기로 결정하였으나, 그 자리에 서기로 한 별운검(別雲劍: 임금의 호위무사)이 갑자기 제외되면서 거사는 실행 일보 직전에 부득이 멈추었다.
공모자의 한 사람인 김질(金礩)과 그의 장인 정창손의 고변으로 부친 성승과 박팽년 등 사육신 그 밖의 연루자가 모두 순절(殉節)하였으며 그의 처와 딸은 노비로 끌려갔다.
1446년(세종 28)에 이루어진 훈민정음(訓民正音) 반포 시에는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당시 요동에 귀양 와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에게 13차례나 찾아가서 정확한 음운(音韻)을 이해하고 배워왔으며 명나라에 가서는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직접 연구하기도 하였다. 이때가 매죽헌의 나이 29세 무렵이었다.
이듬해에는 세종의 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우리의 한자음을 바로잡아 통일된 표준음을 내고자 하는 [동국정운(東國正韻)]을 편찬하여 다음 해에 간행하였다. 이는 중국의 [홍무정운(洪武正韻)]에 대비되는 운서였다.
매죽헌 33세 때(1450년) 명의 사신 예겸(倪謙)이 우리나라에 왔다. 사신을 접대하는 연회에서 서로 시문을 주고받는 자리가 펼쳐지자 매죽헌과 신숙주, 정인지 등이 함께 이에 응하였으며 사신은 이들의 화답시를 보곤 극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조선 전기 성현이 저술한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예겸이 두 선비(성삼문, 신숙주)를 좋아해 형제의 의를 맺었으며 귀국할 때는 눈물을 흘렸다”는 기사가 전한다.
세조가 즉위한 첫해(1456년)에 명의 사신이 온다는 통보가 오자 매죽헌의 부자와 집현전 학사들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를 위한 거사가 논의되었다. 세조를 제거하기 위한 거사는 6월 초하루 창덕궁의 사신 초대연의 자리에서 실행하기로 결정하였으나, 그 자리에 서기로 한 별운검(別雲劍: 임금의 호위무사)이 갑자기 제외되면서 거사는 실행 일보 직전에 부득이 멈추었다.
공모자의 한 사람인 김질(金礩)과 그의 장인 정창손의 고변으로 부친 성승과 박팽년 등 사육신 그 밖의 연루자가 모두 순절(殉節)하였으며 그의 처와 딸은 노비로 끌려갔다.
일상이 곧 예술로 승화된 간찰
우선 간찰의 내용을 요약하면, “보내준 물건에 대해 감사를 표하며 답례로 붓 세 자루와 먹 두 개를 보내는데 그 이유로 붓은 양(陽)에 해당하므로 3과 통하고 먹은 음(陰)에 해당하므로 2로 했다”는 세밀한 설명과 함께 간찰에 알맞은 깍듯한 예의를 갖추고 있어 매죽헌의 곱고 섬세한 심성을 자못 엿볼 수 있다.
간찰 형식에서 상대방이나 어른의 행위를 표현할 때는 행간(行間)을 바꾸거나 글자 하나를 비우고 쓰는데 이 간찰의 경우 행간을 바꾸어 쓴 것으로 보아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최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간찰의 필세를 살펴보면 우선 행초서를 섞어 쓰면서도 한 자 한 자의 자획을 명확히 표현하고 있다. 행필(行筆)의 곧 음과 연결이 아주 유연하게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맑고 강직한 행필은 범상한 필치가 아님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매죽헌은 비해당 안평대군과 아주 가까이 교유해 왔으며 안평의 예단에 속하는 선비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당시의 유행 서체인 조맹부체를 비해당이 아주 선호했던 점을 감안하면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단아하면서도 유려한 매죽헌의 간찰을 조맹부의 글씨라고 해도 그대로 믿을 정도로 그는 조선 초기의 빼어난 명필이었다.
간찰 형식에서 상대방이나 어른의 행위를 표현할 때는 행간(行間)을 바꾸거나 글자 하나를 비우고 쓰는데 이 간찰의 경우 행간을 바꾸어 쓴 것으로 보아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최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간찰의 필세를 살펴보면 우선 행초서를 섞어 쓰면서도 한 자 한 자의 자획을 명확히 표현하고 있다. 행필(行筆)의 곧 음과 연결이 아주 유연하게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맑고 강직한 행필은 범상한 필치가 아님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매죽헌은 비해당 안평대군과 아주 가까이 교유해 왔으며 안평의 예단에 속하는 선비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당시의 유행 서체인 조맹부체를 비해당이 아주 선호했던 점을 감안하면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단아하면서도 유려한 매죽헌의 간찰을 조맹부의 글씨라고 해도 그대로 믿을 정도로 그는 조선 초기의 빼어난 명필이었다.
신원(伸寃)과 복권
매죽헌은 학자이자 시인이요, 외교관으로서 여러 분야에 특출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충절의 관료로만 너무 깊이 각인된 아쉬움이 없지 않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매죽헌의 신주(神主)가 인왕산에서 발견된 것은 2백여 년이 지난 후였다. 매죽헌을 죽음으로 몰았던 세조가 말하기를 “성삼문 등은 금세의 난신(亂臣)이나 후세의 충신이다”고 할 정도로 그의 의절을 높이 샀었다. 이런 분위기가 재론되면서 1691년(숙종 17년) 매죽헌의 관작(官爵)이 회복되었다. 그리고 1758년(영조 34년)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고 충문(忠文)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넓디넓은 한강 물이 굽이쳐 흐르는 노량진 언덕에는 사육신의 묘소가 고즈넉이 들어 있다. 매죽헌 성삼문, 그의 인품과 학식이 오롯이 들어 있는 시문과 글씨는 오늘날 우리에게 또 다른 향훈을 전해주며 그의 충절은 오늘날도 만인의 귀감이 되고 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매죽헌의 신주(神主)가 인왕산에서 발견된 것은 2백여 년이 지난 후였다. 매죽헌을 죽음으로 몰았던 세조가 말하기를 “성삼문 등은 금세의 난신(亂臣)이나 후세의 충신이다”고 할 정도로 그의 의절을 높이 샀었다. 이런 분위기가 재론되면서 1691년(숙종 17년) 매죽헌의 관작(官爵)이 회복되었다. 그리고 1758년(영조 34년)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고 충문(忠文)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넓디넓은 한강 물이 굽이쳐 흐르는 노량진 언덕에는 사육신의 묘소가 고즈넉이 들어 있다. 매죽헌 성삼문, 그의 인품과 학식이 오롯이 들어 있는 시문과 글씨는 오늘날 우리에게 또 다른 향훈을 전해주며 그의 충절은 오늘날도 만인의 귀감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