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명료한
옛사람의 편지

송하 조윤형의
간찰

옛 사람의 간찰(또는 서찰)은 주로 나무나 대나무 조각에 글을 적어 보내던 목간(木簡), 죽간(竹簡)으로 이루어졌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간찰로는 백제 시대의 목간으로 알려져 있다. 종이의 발달과 아울러 경제·문화 등이 급속히 발전한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수많은 간찰이 오고갔으며 지금도 많은 양이 전해지고 있다.
“간찰은 유자(儒者)가 가장 가까이해야 할 일” 로 명도 정호(明道 程顥)가 말한 바처럼 유학이 사회의 기본질서가 되었던 조선의 선비들은 간찰을 통하여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부터 준론(峻論)의 치열한 다툼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뜻을 전했다.
여기서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서예가이자 동국진체(東國眞體)의 계승자인 송하 조윤형(松下 曹允亨, 1725~1799)의 간찰을 통하여 그의 삶과 예술세계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writer. 최견 서예가, 한국서화교육원장

정조(正祖)의 각별한 총애를 받은 서예가

송하의 부친 조명교(曺命敎)는 예문관대제학 등의 관직을 지내면서도 ‘능가사 사적비’를 위시한 여러 비문을 쓸 정도로 당대의 명필로 알려졌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자란 송하 또한 일곱 살 무렵부터 자연스레 붓을 잡아 주변 사람들로부터 글씨를 잘 쓴다는 칭송을 들으며 자랐다는 이야기가 [송하만필(松下漫筆)]에 전한다.
송하는 유년 시절부터 동국진체의 완성자라 불리는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로부터 본격적으로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이는 부친과 원교의 친분이 매우 깊었던 데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스승인 원교의 영향으로 왕희지의 소해(小楷)를 기초로 익힌 후 ‘역산각석(嶧山刻石)’과 같은 고전(古篆)을 배웠으며 더 나아가 왕희지와 안진경, 유공권 등의 필법을 익혀 활달하면서도 변화무쌍한 행·초서를 즐겨 썼다. 이런 연유로 젊은 시절부터 글씨 잘 쓰기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송하는 42세(1766년) 때 문음(門蔭)과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처음 관직에 발을 디뎠으며 57세(1781년) 때 선공감주부가 되었다. 3년 뒤에는 예조정랑을 역임했고 이어서 안악군수와 광주목사,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을 거쳐 67세에 호조참의가 되었으며 73세에 지돈녕부사(정2품)에 올랐다.
정조는 문체반정(文體反正)과 같이 순정(純正)한 글씨를 통한 교화를 목적으로 서체반정(書體反正)을 꾀하였으며 여기에 적극 동참한 이가 송하였다. 유공권의 “마음이 발라야 글씨가 바르다는 심정즉필정(心正卽筆正)”이라는 서예철학을 흠모했던 정조는 송하의 글씨를 무척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글씨에 대한 그의 간언(諫言)을 받아들여 자신의 글씨 공부에 많이 반영하였다. 또한 궁궐에서 필요로 하는 많은 글씨를 송하에게 쓰도록 하였는데 일례로 청(淸)에서 어렵게 구입해 온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의 표제(標題)도 송하에게 맡겼으며 송하는 이를 5천 번 이상 연습해 썼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요점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짧은 글

송하의 간찰은 경북 상주의 연안 이 씨 집안의 유물로 내려오는 [청구필법(靑丘筆法)] 서첩에 수록되어 있다. 소략하면서도 유려 단아한 필체의 간찰 내용을 보자.

벌써 추워졌군요. 몸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나라에서 글씨 잘 쓰는 사람으로는
먼저 경홍(한석봉)을 치지만 아울러 백하(윤순)의손가락과 팔뚝의 기운을 펼치는 삼매경(三昧境)을 느껴보는 것도 좋지 않을는지요.
대면할 날짜는 기약할 수 없지만 멀리서 그리워하며 이만 줄입니다.
즉 제(第) 윤형 머리를 숙이며...

已寒矣 惟體內深處珍嗇 我朝操翰家 首推景洪 而若白下之宣發指腕
間三昧 不亦可珍 未期對展 第有遙想 不宣拜狀 卽 弟 允亨 頓首

아주 짧은 글이지만 옛사람의 예법과 격식을 잘 갖추고 있어 요즈음 우리 세대에서도 편지 또는 각종 메시지에 충분히 활용할 만한 좋은 예시의 하나로 보인다.
간찰의 내용을 보면, 누군가가 배울만한 글씨에 대해 물어왔으며 이에 대해 송하는 조선 중기의 명필 석봉 한호를 최고로 치면서도 자신의 스승(이광사)의 스승인 백하 윤순의 글씨를 배워 볼 것을 은근히 권유하고 있다. 간찰 말미에 자신을 ‘제(弟)’라 표현한 것으로 보아 받는 이는 송하보다 아랫사람임을 알 수 있다.

명승에 걸맞은 송하의 글씨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누대(樓臺)의 하나로 손꼽히는, 푸른 남강 언덕에 위용을 자랑하는 진주 ‘촉석루’와 잔잔히 흐르는 밀양강 위에 아름답게 펼쳐진 밀양 ‘영남루’, 이 두 누각의 편액에는 명승에 걸맞는 명필의 휘호가 시원스럽게 얹혀 있는데 이 둘 다 송하의 글씨이다. 이외에도 공주 마곡사의 ‘심검당’, 안동 하회마을의 ‘화수당’ 등의 휘호가 모두 송하의 글씨이니 당시 그의 필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송하는 글씨 외에도 화훼와 대나무를 잘 쳤는데 이런 그림과 글씨의 빼어난 솜씨는 그의 사위이자 후대의 명필인 자하 신위(紫霞 申緯)에게도 많이 전해진 것으로 알려졌다.이윽고 송하도 생을 마감하였으니 향년 75세였다.
글씨 하나로 일세를 풍미했던 송하 조윤형. 군신(君臣)과 백성들의 큰 사랑을 받으며 남긴 그의 묵적(墨跡)들은 물 흐르듯 자유분방하면서도 격조 높은 운치와 함께 창신의 세계를 우리들 가슴에 오랫동안 전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