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가
초의선사에게 보낸 간찰

해학과 정이 넘치는 금란지교의 옛 편지

금처럼 단단하면서도 난초처럼 향기로운 우의를 지속적으로 나누는 사이를 금란지교(金蘭之交)라 일컫는데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와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 간의 우의를 말할 때 어김없이 인용될 정도로 이들 두 사람의 우의가 깊었다. 남부럽지 않은 경화사족으로 태어난 추사가 영조의 사위가 되는 월성위의 가통을 잇는 증손자로 입양되어 학문과 글씨로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면, 초의는 전남 무안에서 평민의 후손으로 태어나 15세에 나주의 운흥사에서 출가해 불도를 수행한 일개 선사에 지나지 않았지만 학문의 깊이만큼은 남달랐다.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만남의 횟수는 적었지만 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평생토록 우의를 이어갔다. 여기서는 추사가 제주 유배 시절 초의에게 보낸 간찰을 살펴보면서 추사의 생활 속 글씨 예술과 두 사람 간 교유의 정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writer. 최견 서예가, 한국서화교육원장

필연과 같은 두 사람의 만남

초의가 처음 한양에 발을 디딘 것은 30세 때였으며 수락산 학림암에서 추사와 그의 아우 산천 김명희를 함께 만났다. 초의는 강진에 유배 와 있던 다산 정약용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다산초당에 들르면서 자연스럽게 다산의 아들 정학연과도 친교를 맺고 있었기에 정학연이 추사 형제를 초의에게 소개해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승승장구를 구가하던 추사 집안에 검은 장막이 덮이기 시작한 것은 추사가 암행어사 직무를 수행하면서 봉고파직했던 김우명이 안동 김문의 권세를 업고 추사 집안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로 인해 추사 부친이 고금도에서 3년의 유배 생활을 했고 7년 뒤에는 추사가 동지 겸 사은사 부사로 내정되었을 때 이미 별세한 부친은 삭탈관직이 되고 추사 자신도 노년에 접어든 55세의 나이에 36대의 곤장을 맞는 말할 수 없는 수모를 당하고 겨우 목숨을 건져 제주 유배길에 올랐다. 한양을 떠난 추사는 초의가 거처하는 해남 대흥사를 잠시 들른 후 제주를 향했다. 낯설고 물선 제주 땅에 이르러 학질 등을 앓으며 참기 힘든 귀양생활을 이어갔다. 제주 생활 3년 차에는 그리도 그리워하던 부인 예안 이 씨가 병고를 이기지 못해 운명했다는 청천벽력의 비보가 전해졌다. 이런 안타까운 소식을 들은 초의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 이듬해 봄 홀연히 추사 앞에 나타났다. 푸른 파도를 건너 영주(瀛州, 제주) 땅에서 만난 두 사람은 평소 수없는 서신으로 교감하던 시문과 그림과 글씨, 불교 논쟁 등을 주제로 밤새워 가며 담화의 꽃을 피웠다. 반 년이나 훌쩍 지난 어느 가을날, 추사의 간곡한 만류에도 초의는 행장을 꾸려 뭍으로 떠났다.

일상에서도 빛나는 서예술

다음은 추사가 제주 적거지에 온 지 3년차가 되었을 때 초의에게
보낸 편지 글이다.

초의가 보낸 한 편의 서찰을 얻어도
다행스러우니 어찌 파도가 층층이
이는 바다를 넘어서 멀리 오기를 바라겠소.
중략 (대승의 법문을 하는 그대가 바빠서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니)
모쪼록 나 같은 범부에게 와서
금강저(金剛杵)를 한 번 얻어맞아야만
비로소 하나의 성과를 얻지 않겠소.
차(茶) 포장은 과히 아름다웠으며 차
삼매(三昧)의 경지를 능히 얻은 듯하오.
중략 (글씨는 오랜 세월을 해도
이루어지기 어려운데)
어느 때를 따지지 말고 선사가 오셔서
스스로 취하여 가는 것이 좋을 것이오.
다 펼치지 못함.

— 임인년(壬寅年, 1842, 헌종8) 10월 6일에 씀

추사는 초의에게 서신을 보낼 때마다 동갑내기 벗으로서 늘 장난기가 발동했는데 여기에서도 어김없이 초의에게 대승을 공부하는 자가 사소한 일에 얽매어 있음을 짐짓 탓하면서 자신이 이를 깨우쳐주겠다고 큰소리치고 있다. 그래도 보내 준 차에 대한 칭송은 잊지 않음으로써 고마움을 전하는 반면 어렵게 이룬 자신의 글씨만큼은 초의가 직접 와서 가져가야 한다고 일러 주면서 초의를 보고 싶어 하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전체 16행에 이르는 글씨는 질서정연하면서도 힘찬 필세가 지면을 아우르고 있다. 조선 시대 간찰이 대부분 초서로 써 유연한 흐름을 특징으로 하는 반면 추사의 간찰은 여기서 보듯 행서를 위주로 하면서 일부만 초서를 섞어 씀으로써 강인한 인상을 깊게 심어 주고 있다. 자형은 크고 작음을 떠나 모두가 유연하게 어우러지는 모습이 마치 행운유수와 같이 자연스럽다. 특히 아래로 힘차게 쭉쭉 뻗은 행필은 굳세면서도 시원스럽기 그지없다.

이별을 고한 40여 년의 오랜 우정

8년 몇 개월 만에 해배의 기쁨을 얻은 추사는 초의가 있던 해남 일지암을 잠시 거쳐 마포 강변에 거처를 마련했었다. 이듬해에 초의가 찾아와 2년을 함께 기숙하며 다사로운 우의를 나눌 수 있는 호사 아닌 호사를 누렸지만 추사가 함경도 북청으로 또다시 유배됨으로써 슬픈 이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북청에서 1년의 시련 끝에 돌아온 추사는 얼마 뒤(4년) 과천의 과지초당에서 향년 71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2년 뒤 예산 묘소를 찾은 초의는 눈물겨운 제문을 올렸다. 추사 사후 꼭 10년을 더 산 초의는 일지암에서 서쪽을 향해 가부좌를 한 채 조용히 입적했으니 향년 81세였다.추사와 초의, 조선 후기라 할지라도 엄연히 유가(儒家)와 불가(佛家)로 나뉘어 있었지만 두 사람은 그들의 인품과 학식의 깊이만큼이나 거리낌 없는 깊고 돈독한 우의를 나누었다. 이런 두 사람의 따스한 정리와 향훈은 창랑의 물결이 쉼 없이 일렁이듯 우리들 가슴에 끝없이 밀려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