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호관 이인상의 검선도(劍仙圖)

낙락장송 같은
고고한 기상의 선인(仙人)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사대부와 문인들을 중심으로 번잡한 세상사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 속에 은거하거나 솔숲을 한가롭게 소요(逍遙)하는 선인(仙人)을 동경하는 풍조가 사회 전반에 널리 퍼지면서 그림의 소재 중에서도 송하인물도(松下人物圖)가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림의 주제로 소나무가 주로 등장하게 된 현상은 중국이나 우리나라가 비슷한데 이는 뿌리가 깊어 척박한 땅에서는 물론 추운 계절 등을잘 견디며 강인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사계절 푸름을 유지하는 모습 또한 올곧은 선비의 표상으로 삼을만 하였기 때문이다. 소나무와 함께 그려지는 인물은 신선이나 고승 또는 은일자 등 그림의 주제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다.여기서는 송하관폭도(松下觀瀑圖), 송하간서도(松下看書圖) 등 소나무와 어우러진 다양한 인물들을 그려온 능호관 이인상(凌壺觀 李麟祥, 1710~1760)의 검선도(劍仙圖)를 통하여 그의 삶과 예술세계를 더듬어보고자 한다.

writer. 최견 서예가, 한국서화교육원장

그림과 검을 사랑했던 삶

능호관은 고조부가 영의정을 지낸 이경흥(李敬興)으로 당대 최고의 명문으로 알려져 있으나 증조부 이민계(李敏啓)가 서출이었기에 능호관 자신도 일생을 두고 따라다닌 서얼이란 엄혹한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일곱 살 때 능호관은 가벼운 ‘고운마마’를 앓았다. 병이 나으면 집안 어른들이 이를 대견하게 여겨 노리개 등을 선물하는 풍습이 있던 당시 능호관은 이런 노리개를 마다하고 그림책을 원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란 이유로 숙부로부터 거절을 당할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대한 호기심이 매우 많았다.
나아가 능호관은 성장기 때부터 “예()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전서를 잘 썼으며 옛 노래에도 능했다”고 황경원(黃景源)이 쓴 ‘능호관묘지명’이 전하고 있다. 아울러 칼을 가지고 놀기를 좋아했으며 커서는 검객 내지 협객이 되기를 원했다는 사실을 능호관은 자신의 시에서 밝히기도 했다.
능호관이 진사시에 합격한 것은 26세 때며 음보(蔭補)로 북부 참봉(參奉)의 말직에 처음 나아간 것은 30세가 되었을 때였다. 이후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을 거쳐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 등 9년간 내직(內職)을 거쳤다.외직인 사근찰방(沙斤察訪)에 부임한 것은 38세 때며, 약 2년 정도 직무를 매우 성실히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능호관은 자신의 결의를 다스리기 위해 지리산에서 9촌() 길이의 ‘삼인칠성검(三寅七星劒)’을 제작해 평소에 늘 지니고 다녔다. 삼인칠성은 년, 월, 시 모두가 인()에 해당할 때 제작하고 검신에 북두칠성을 새긴 것을 뜻한다.
41세 때 음죽현감(陰竹縣監)에 부임하여 3년여를 있다가 관찰사와의 마찰로 그만 둔 뒤에는 서울의 종강(지금의 명동 부근)에 모루(茅樓. 초가)를 짓고 젊었을 때부터 그리워하던 은일의 삶을 이어갔다.

꼿꼿한 필선으로 그려낸 선인의 세계

두 그루 소나무, 하나는 하늘로 힘차게 솟아 있고 다른 한 그루가 옆으로 비스듬히 교차하는 한 가운데에 선인(仙人) 혹은 도인(道人)으로 보이는 이가 정좌를 하고 앞을 근엄하게 응시하고 있다.
머리에는 얇은 두건을 가볍게 얹었지만 둥근 봉황 눈썹 아래 매의 눈으로 보는 시선은 보는 이로 하여금 왠지 몸을 움츠려 들게 한다. 연지를 바른 듯 붉은 입술과 꾹 다문 입은 감히 말을 건넬 수 없게 하며 바람에 나부끼듯 흔들리는 턱 수염과 도복의 옷깃이 그래도 조금은 여유롭게 보인다.
선인의 품격에 걸맞게 배치한 등 뒤 높게 치솟은 소나무는 낙락장송인 듯 곧은 줄기인데 반하여 풍성한 가지는 가파른 굴곡을 이루며 아래로 무성하게 잎을 떨어뜨리고 그 위에 넝쿨마저 몇 가닥 올려놓아 긴장과 여유로움을 묘하게 대비시키고 있다. 오른팔 옆에 놓인 화려한 손잡이의 장검을 보아 소나무 아래 선인은 검을 다루는 검선(劍仙)임이 분명해진다.
담묵과 꼿꼿한 붓끝으로 그려낸 필선은 머뭇댐 없이 능란하게 전체를 아우르고 있고 화폭에서는 차가우면서도 냉엄한 분위기와 선인의 내면에 가득찬 인자함이 교차되어 나타난다. 이는 능호관이 추구하는 은일자의 고고한 기상과 세속과 단절된 무욕의 경지에 이르고자 했던 자신의 자화상으로 보아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개결한 선비의 전형

산수와 문장 그리고 술을 사랑한 능호관은 한평생 남의 일과 말에는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았으며 소탈한 성품으로 자신의 의지에 따라 끝까지 행동하는 개결(介潔)한 선비의 전형을 보였다. 이처럼 호방한 기상을 가진 예술가이자 선비였지만 곤궁과 은일 속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으니 향년 51세였다. 자신의 꿈과 이상을 지키려 ‘삼인칠성검’을 가슴에 품고 결의를 다지던 능호관 이인상. 이제 그는 스스로 낙락장송 아래의 선인이 되어 후대인의 옳고 그릇됨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