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일TMI

이번 역은 ‘페이지’,
내리실 곳은 ‘상상’입니다

철도는 단순히 A에서 B로 이동하는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문학에서 철도는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관문이고, 누군가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장소이기도 하다. 책장 너머로 펼쳐진 철도의 풍경은 어떠할까? 문학이라는 이름의 열차에 탑승하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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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저 ┃ 범우사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면 설국이었다. 밤의 끝자락은 이미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췄다. 맞은편 좌석에서 처녀가 일어나더니 시마무라 앞의 유리창을 열었다. 차가운 냉기가 밀려들었다. 처녀는 차창으로 몸을 한껏 내밀고 멀리 외치듯이 소리를 쳤다. ‘역장니임, 역장니임’

소설의 도입부이자 가장 유명한 장면이다. 철도는 도쿄와 설국, 현실과 환상을 가르는 경계선이다. 터널을 빠져나오는 순간, 기차는 새로운 세계의 문이 된다.

《안나 카레니나》 레프 톨스토이 저 ┃ 민음사

과연 저 멀리서 기관차의 기적 소리가 들려왔다. 몇 분 후, 플랫폼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기차가 추위 때문에 아래쪽으로 증기를 내뿜으며, 천천히 규칙적으로 가운데 바퀴의 지렛대를 돌렸다 폈다 하면서 역 안으로 들어왔다. (···) 브론스키는 차장을 뒤따라 객차로 들어가다가 어느 부인에게 길을 내주고자 객차의 입구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안나와 브론스키가 처음 마주하는 장면이다. 이 작품에서 기차는 이후에도 중요한 상징으로 반복 등장한다. 두 사람에게 철도는 뜨거운 사랑의 출발점이자, 끝내 피할 수 없는 비극을 미리 비추는 불길한 징후로 작동한다.

《은하철도의 밤》 미야자와 겐지 저 ┃해밀누리

정신을 차려 보니, 아까부터 덜컹덜컹덜컹덜컹, 조반니가 탄 작은 열차가 계속 달리고 있었다. 정말로 조반니는 밤의 경편 철도, 작은 노란 전등이 늘어선 객실에서 창밖을 보며 앉아 있었다. (…) 그 작고 아름다운 기차는 하늘의 억새가 바람에 나부끼는 속을, 은하수의 물과 삼각점의 푸르스름한 미광 속을, 어디까지고 어디까지고 달려가고 있었다.

이 열차는 목적지로 향하는 교통수단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건너는 영혼의 여정 그 자체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저 ┃ 비채

그레고리우스는 숨이 턱에 차서 자리에 앉았다. 기차가 이룬을 향해 출발하자 제네바에서 그를 엄습했던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무척이나 명료하며 매우 현실적인 이 여행, 시간이 흐르고 역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그를 지금까지의 삶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하는 이 여행이 계속될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자신이 아니라 기차라는 생각이 들었다.

철도는 익숙한 삶을 떠나 다른 인생으로 접어들게 하는 결심의 장치로 쓰인다.

《펭귄철도 분실물센터》 나토리 사와코 저 ┃ 현대문학

“요는 분실물을 취급하는 직장이에요. 승객이나 역을 이용한 분들이 잃어버리거나 주운 물건을 보관했다가 반환하기도 하고 반환 안 하기도 하는 일이에요.”

“반환을 안 하면 어떡해.”

준페이가 손바닥을 접수대에 내리쳐도 소헤이는 헤실헤실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철도는 우연한 만남과 회복을 품는 공간이다. 사람과 사연이 잠시 머물며 다시 연결되는 따뜻한 배경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