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철도의 역사
철도의 역사를 보면 자력으로 주행하는 철도차량의 탄생은 증기기관의 발명에서 시작하였다. 1804년, 영국의 기술자 리처드 트레비식(Richard Trevithick)은 세계 최초로 레일을 주행하는 증기기관차 실험에 성공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1825년, 조지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이 관여한 스톡턴–달링턴 철도(Stockton and Darlington Railway)가 개통되면서 철도사에 있어 획기적인 걸음을 내디뎠다. 스톡턴–달링턴 철도는 잉글랜드 북동부의 달링턴과 항구도시 스톡턴을 연결한 노선으로, 개통 초기에는 여객열차도 운행되었다. 그러나 이 노선의 본래 목적은 내륙의 탄광에서 항구로 석탄을 운송하는 데 있었으며, 산업혁명기의 물류 인프라로 기능했다.
본격적인 도시 간 철도의 성립은 그로부터 5년 뒤인 1830년, 조지 스티븐슨이 이끈 리버풀–맨체스터 철도의 개통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노선에서는 복선선로의 채택, 신호장치의 정비, 열차운행 다이어그램의 도입 등 오늘날 철도 운영에 기본적으로 활용되는 기술과 제도가 체계적으로 도입되었다.
이후 철도는 물자와 인력을 대량으로 수송할 수 있는 핵심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으며, 산업혁명의 심화와 근대 경제 활동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한편으로는 전쟁이나 강제 이송과 같은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도 이용되었기에, 철도는 인류사에서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짊어진 존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200년에 걸친 근대 인류의 역사는 철도의 존재 없이 결코 설명될 수 없다.
스톡턴-달링턴 철도 노선 개통 100주년 퍼레이드
출처 ETH Library Zurich
우리나라 철도의 시작
우리나라 철도는 1899년 9월 18일, 노량진과 제물포를 잇는 구간이 개통되면서 시작되었다. 당초 철도 부설권은 미국인 모스가 획득하여 공사를 시작했으나, 자금 부족으로 인해 그 권리를 일본 측에 양도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은 경인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은행과 민간 자본을 통해 건설 자금을 조달했으며, 이 회사는 일본 정부의 보증을 받았다.
뒤이어 일본 자본으로 경부철도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부산과 서울을 잇는 철도 건설이 착수되었다. 이때 일본과 러시아 간의 전쟁이 발발했고, 경부선은 전쟁 수행의 주요 수송로로 활용되었다. 승전 이후 일본은 1906년
철도의 국유화를 단행하고, 본격적인 대륙 경영을 추진하기 위해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이하 만철)를 설립하는 동시에 경부철도 국유화 관련 법률을 통과시켰다. 이와 같은 1906년의 일련의 조치는 동아시아 정세에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일본은 철도 국유화를 통해 사철을 합병함으로써 통일된 철도 경영 체제를 구축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륙 진출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경부철도는 이러한 합병 방식에 의해 국유화되었으며, 만철은 대륙 경영의 핵심 조직으로
자리 잡았다. 일본은 영국의 인도 통치 과정에서 동인도회사의 운영 경험을 참고하여, 반관반민 성격의 기업으로 만철을 설립한 것이었다. 이후 만철은 동아시아 역사 전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편 우리나라는 일본에 병합되면서, 철도 역시 식민지 경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였다. 일본은 토지·재정·철도 등 세 분야에서 식민지적 수탈 정책을 체계적으로 추진하였다.
1911년에는 만철과 철도가 연결되었고, 이 노선은 일본과 만주를 잇는 주요 통로가 되었다. 1917년에는 만주와 조선을 일체적으로 경영한다는 명목 아래, 조선의 철도를 만철에 위탁하여 1925년까지 운영하게
하였다. 1925년 철도가 다시 조선총독부로 환원되었으나, 1927년 수립된 ‘조선철도 12년 계획’을 통해 함경선이 두만강을 거쳐 만철과 연결되면서, 이른바 ‘동해의 일본 호수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이를 위해
만철 측에서는 길회선을 부설하고, 나진항을 비롯한 항만을 개발했으며, 청진과 나진항의 운영도 만철에 위탁되었다.
이 과정에서 동아시아는 국제적 분쟁의 무대로 변해 갔다. 만주를 둘러싸고 중국·러시아·미국·일본이 치열하게 경쟁했고, 그 중심에는 철도가 있었다. 교통로의 확보가 전쟁 수행과 자원 이동의 핵심 조건이 되면서 각국의
경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거치며 철도는 본격적인 전쟁 수행 수단이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기를 지나면서 그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놓이게 되었다. 우리나라 철도 또한 전쟁
수행을 위해 이용되었고, 이러한 비극적인 과정을 거쳐 우리는 해방을 맞게 되었다. 결국 일제강점기의 우리 철도는 대륙 연결, 만주와의 일체적 경영, 동해의 호수화 전략, 그리고 전쟁 수행이라는 목적 아래 운용된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한탄강 교량 시범운전(1912년 4월)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해방 이후의 발전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우리나라 철도는 자주적 발전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조선해방자호’를 우리 힘으로 운행하게 되었고, 교통부가 철도 운영을 담당하면서 새로운 철도 노선과 발전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 철도는 1950년 6·25전쟁으로 다시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기관차의 약 26%, 화차의 78% 이상이 파괴되는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철도는 부흥을 위해 치열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러한 과정에는 수많은 철도인의 헌신이 있었다. 향후 이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 또한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교통부 소속 조직으로 출발한 철도는 1963년 철도청으로 독립하며 외청 체제로 전환되었다. 이와 함께 특별회계를 통해 일정 수준의 자립 경영이 요구되었다. 철도는 건설과 운영 과정에서 초기 투자비가 매우 크고 수익성
확보가 쉽지 않기 때문에, 정부가 주도적으로 건설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공공성의 경제학적 근거는 시장 실패, 사업의 자연독점, 도로교통과의 형평성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로 세계적으로도 정부 주도형
건설·운영 방식이 보편적이었으며, 사철이 발달한 일본만이 예외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다만 공공성과 더불어 효율적 경영 역시 동시에 요구되는 과제가 되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철도는 우리나라의 고도 경제성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산업 노선에 전철이 부설되면서 석탄·시멘트 등 원료 수송과 통근·통학 수송에서 철도는 일정 수준의 수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철도 경영은 화물 수입과 여객 수입의 비율이 3:1 정도를 이룰 때 안정적인 운영이 가능하다고 보는데, 당시 우리나라 철도는 이 기준을 어느 정도 충족하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시기인
1974년에는 서울 지하철이 개통되었다. 이는 급격히 증가한 서울 인구와 도시화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도시철도는 수도권의 성장과 확대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전차는 이미 19세기 말
서울에 등장하여 1968년까지 운행되며 자동차 교통이 본격화되기 이전까지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전차는 최근 세계 여러 나라에서 환경문제 해결의 대안으로 부활하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1968년 운행이
중단되었다가 오늘날 다시 트램 형태로 재도입이 추진되고 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자동차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교통 지체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고, 물류비 또한 국가 경제에 큰 부담이 되었다. 이에 경부축의 물류비를 절감하기 위해 경부고속철도 건설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문제는 경제성의 확보였다. 막대한 초기 투자비에 비해 충분한 편익을 창출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경제성 확보의 핵심 논리는 고속철도를 통해 자동차 수요 일부가 철도로 이전되고, 그 결과 기존 철도 노선에서 화물 수송이 확대되어 물류비 절감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수요 확보와 투자비 회수를 위해
고속철도 노선 일부는 기존선을 활용하도록 설계되었으며, 동시에 안정성 확보와 기술 자립을 위한 다양한 노력이 병행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경부고속철도는 2004년 마침내 개통되었다. 이후 전국은 일일생활권 시대로
접어들었고, 경부선과 호남고속철도의 개통을 통해 우리나라는 이른바 ‘철도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경부선 해방자호(1948년)
철도 정책과 투자의 변화
1962년 경제개발5개년계획 모형전시
출처 《사진으로 보는 신한국철도사》
철도정책의 변화를 살펴보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는 교통정책의 중심을 철도에 두어 교통망을 구축하였고, 특히 석탄 등 에너지원 수송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에도 차량
구입과 중앙선 CTC, 그리고 이후 추진된 수도권 전철화 등에 외자가 투입되었다.
이 시기 철도의 수송 비중은 매우 높았다. 1966년 여객 수송 분담률은 인·km 기준 42.5%, 화물 수송 분담률은 ton·km로 기준 81.6%에 달하였다. 이러한 영향력은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진행되던 1976년까지 이어져, 여객은 24.4%, 화물은 49.5%의 분담률을 기록하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철도 여객 수송량은 1966년 이후 증가 추세를 이어 왔으며, 특히 도시철도와 2004년 고속철도의 개통을 계기로 더욱 확대되었다. 반면 철도 화물 수송량은 경제 성장이 지속되었음에도 감소 추세를
보였는데, 이는 도로 화물 수송의 급증에 기인한 것이다.
우리나라 철도 수송량은 전체 교통량과 비교할 때 도로 수송의 비중이 높아, 여객과 화물 모두 도로 수송 증가율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특히 화물 수송의 비중이 매우 낮은 편이다. 다만 1966년 이후 1970년대
말까지는 철도 수송의 비중이 비교적 높았던 시기가 있었고, 이 과정에서 외자 또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철도 수송량과 경제성장률의 관계를 살펴보면 일정한 상관성이 나타난다. 특히 급격한 경제성장률을 기존 철도가 감당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이러한 점이 고속철도 도입 논의를 본격화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고속철도의 계획
고속철도 건설은 현재의 국가철도공단에 해당하는 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이 중심이 되어 추진되었다. 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은 출범 당시 최고 속도 140km/h 수준이던 철도를 300km/h급으로 고속화한다는 획기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이에 필요한 인프라 건설의 책임을 맡아 사업을 주도적으로 수행하였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나라의 철도 건설 기술과 노반·교량 등 토목 기술은 국제적인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철도의 기본 기능은 빠르고 안전하며, 여객과 화물을 가능한 효율적인 방법으로 수송하는 데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정책 결정의 기준에는 안전성과 효율성뿐 아니라 적법성, 문화적 가치 등의 요소도 함께
고려된다.
우리나라에서 고속화 논의는 1970년대부터 제기되었으나, 본격적인 추진은 1980년대 말 정책 결정자 그룹의 결단과 추진력에 힘입어 이루어졌다. 고속철도는 1989년 기본계획이 수립된 뒤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2004년 개통에 이르렀다. 이러한 도입 과정은 1960~1970년대 고도 경제성장, 그리고 자동차 증가로 인한 사회적 비용 부담이 커진 사회·경제적 환경 속에서 진행되었다. 여기에 외자의 활용을 통한 경제성장,
그리고 철도인의 꾸준한 속도 향상 노력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은 1960년대 평균 9.5%, 1970년대 9.3%, 1980년대 9.9%를 기록하였다. 자동차 등록 대수는 1980년 50만 대에서 1985년 100만 대, 1990년 270만 대로
증가하여 1990년에는 1980년에 비해 약 5.4배에 달하였다. 특히 1970~1980년대 중동 건설 붐은 우리 경제의 급격한 성장에 큰 계기가 되었다.
고속철도 도입에는 해외 조사단과 국내 연구진의 노력이 기초가 되었다. 1973년 철도 차관 도입과 관련하여 세계은행(IBRD)은 서울–부산 간 수송 애로 해소를 위한 장기 대책을 마련하고자 프랑스와 일본 기술연구원에
연구를 의뢰하였다. 이들은 경부축에 새로운 철도 건설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제시하였다. 이후 1978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연구, 1983년 한국·미국·덴마크의 공동 타당성조사 등 여러 차례의 연구와 검토를
거치면서 경부고속철도의 필요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고, 논의가 점차 구체화되었다.
우리나라 고속철도의 발전 과정에서 반드시 언급해야 할 점은 고속철도 도입 이전부터 이루어진 속도 향상 노력이다. 1987년 7월 6일, 최고 속도 140km/h급 열차가 처음 운행되었는데, 이는 당시 최기덕
철도청장(재임: 1983~1988년)의 추진으로 가능했다.
고속철도 계획 단계에서 최고 속도 140km/h의 새마을호 운행 경험을 바탕으로, 향후 10년·20년 뒤를 내다보고 최고 운행 속도를 300km/h로 설정한 결정 역시 큰 의미를 갖는다.
고속화 논의는 1970년대부터 이어져 왔으나, 본격적인 추진은 1980년대 말 정책 결정자들의 결단과 추진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중심에는 김창근 교통부 장관이 있었다. 그는 경북 안동 출신으로 4선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필리핀과 미국에서 수학한 뒤 1988년 12월 5일부터 1990년 3월 18일까지 약 1년 3개월간 교통부 장관으로 재임하였다. 비록 짧은 재임 기간이었지만, 이 시기에 우리나라 교통의 미래를 바꾼
고속철도 계획이 완성되었다.
김 장관은 1989년 3월 18일, 경부고속철도를 1991년 8월 착공하여 1998년까지 부산까지 2시간 이내에 운행하는 체계를 구축한다는 계획을 공식 발표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고속철도기획단이 구성되었고, 건설
추진을 위한 제도적·기술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사업을 추진한 장본인이었던 김 장관은 1991년 8월 1일 별세하였다. 당시 실무 책임자였던 정종환 전 장관과 김세호 전 차관 등도 고속철도 추진
과정에서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오늘날 고속철도는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과 지역 간 이동성 향상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우리나라 철도는 세계 철도 개통 200주년의 흐름과 더불어, 1876년 개항 이후 철도 도입 필요성이 논의되던 시기부터 세계 철도 발전사와 같은 맥락 속에서 성장해 왔다. 이제 우리 철도는 동아시아의 철도 강국으로
자리매김하며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철도의 과거는 오늘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 토대이자, 미래를 이끌어 갈 중요한 자산이다. 과거의 역사는 단순한 기록을 넘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지침이 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철도의 역사와 그
의미는 오늘날 새롭게 조명되고 있으며, 새로운 가치로 부활하고 있다.
국산 1호 KTX 출고식(2002년)
출처 《사진으로 보는 신한국철도사》